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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26. 2023

숨어 있던 보물상자 같은 소설

스티븐 킹의 『리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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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랄프야."

어쩌면 스티븐 킹은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 소설을 쓸 것인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장편소설 『리시 이야기』의 주인공 스콧 랜던은 공포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그가 아내인 리시에게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다가 길을 잃은 개 랄프가 3년 만에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온 실화를 들려주며 '현실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나지만 소설에서 이렇게 쓰면 편집자들이 플롯이 없다는 소리를 한다'며 투덜대기 때문이다. 이른바 '핍진성'에 대한 얘기다. 스티븐 킹이 주인공의 남편을 소설가로 설정한 건 소설을 쓰는 자신의 이야기를 실컷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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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영화는 한 때의 영화 천재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만든 《마지막 영화관(The Last Picture Show)》이다. 킹은 새파랗게 젊은 제프 브리지스나  티모시 보텀스 얘기를 많이 하지만 나는 쉬빌 셰퍼드의 어린 시절이 더 기억에 남았던 영화다. 아무튼 스콧은 이 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보고 또 돌려 스무 번 이상 보는 것은 물론 영화에 흐르는 행크 아론의 목소리를 두고 '행크 형님'이라 부르며 애정을 과시하기도 한다(나는 이 대목에서 류승완 감독이 '친구들 영화제'에 나와 크리스토퍼 월큰이 출연한 아벨 페라라의 영화를 소개하면서 "우리 월큰 형님이..."라고 하던 게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나도 예전에 비디오로 봤던 그리운 영화 '마지막 영화관'을 다시 찾아 읽고 싶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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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얘기가 많이 나온다. 스콧 랜던은 앨프리드 베스터가 쓴 『타이거! 타이거!』를 가장 좋아한다. 물론 보르헤스, 핀천, 타일러(앤 타일러일 것이다. 스티븐 킹이 앤 타일러의 소설을 오디오로 들으며 운전하는 걸 좋아한다고 쓴 적이 있으니까), 애트우드 등도 즐겨 읽는다. 소설 중간에 '스콧은 어디를 가든 책 한 권은 꼭 들고 다닌다'라고 묘사되는데 그때 등장하는 책이 바로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이다. 반면 아내 리시는 마이브 빈치, 콜린 맥컬로, 조이스 캐럴 오츠를 즐겨 읽는다. 그 밖에도 '오스틴이나 도스토예프스키나 포크너' 같은 대작가들에게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보시다시피 아주 많은 작가와 작품이 등장하므로 소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다른 책이 마구 읽고 싶어지는 목마름을 경험하게 된다. 스티븐 킹은 이걸 노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광팬에게 암살당한 소설가 남편이 죽기 전 아내에게 남겨 놓은 비밀 쪽지 찾기'와 '또 다른 광팬에게 쫓기는 소설가의 아내'라는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스티븐 킹의 문학적 뿌리가 어디인가를 고백하는 내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런데 표 4(책 뒤표지)를 보면 스티븐 킹 최초의 사랑 이야기라는 둥 헛소리를 잔뜩 써 놓았다.  마치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뒷면에 쓰여 있던 글들과 마찬가지로 '책을 전혀 읽지 않고 쓴 것 같은' 비평이다. 왜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지 이해하기가 좀 힘들다. 적어도 리시 이야기가 '가장 소박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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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끝나면 나오는 '지은이의 말을 읽으며 감탄했다. 스티븐 킹은 작품에 등장하는 문구나 네이밍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세세하게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모두 하룻밤 새 일어난 일이라니."라는 말은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스쿠루지 영감이 한 소리라는 걸 본문에서 밝히고 있지만 마이클 코널리나 돈 드릴로의 소설에서 가져온 대목들은 작가가 말해주지 않으면 끝까지 몰랐을 것들이다. 스티븐 킹은 래리 맥머트리가 각본을 쓴 《마지막 영화관》의 대사 얘기도 언급하는데 그걸 읽다가 래리 맥머트리를 검색해 보니  《브록백 마운틴》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타기도 했던 엄청난 시나리오 작가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감탄스러운 대목은 편집자에게 바치는 헌사다. 만약 최고의 작가가 최대한 겸손하게 편집자를 칭찬하는 글을 읽고 싶다면 이 글을 찾아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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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정세랑 미니 픽션 『아라의 소설』 중 중고책방이 무너지는 바람에 책더미에 깔려 있던 여자애 이야기를 다룬 짧은 소설에서 스티븐 킹의 작품 중 좋아하는 셋을 고른다면, 이라고 하고는 《리시 이야기》, 《돌로레스 클레이본》, 《조이랜드》를 꼽았기 때문에 빨리 읽게 되었다. 정가 8,500원 때 나온 소설이지만  알라딘에 가서 3,700원 4,400원씩 주고 상하 두 권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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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제 너무 일찍 잠드는 바람에 한밤중에 일어났다가 마침 그때 독서가 끝나는 바람에 내친김에 쓰는 것이다. 나는 독후감이나 영화 리뷰 등은 뽕이 차오를 때 즉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그때가 아니면 쓸 동력을 잃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글도 새벽인 지금 쓴다. 완벽하게 쓰는 것보다는 빨리 쓰는 게 나으니까.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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