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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Feb 26. 2023

마티즈 안에 요조와 함께 타고 있던 것들

요조 산문 『만지고 싶은 기분』

요조는 하얀색 마티즈를 타고 다닌 적이 있었다고 한다. 위험천만하게 매니저의 오토바이에 매달려 가던 딸을 목격한 어머니 백기녀 씨가 급하게 사준 것이었다.  '이민석'이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정처 없이 여행도 가고 했던 그 차 안에서 요조는 밤이면 잠도 자고 밥도 먹고 노래 연습도 하고 울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손도 잡고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 하얀색 마티즈의 추억을 생각하던 요조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함께 떠올린다. 나는 요조의 글 '우리 둘이서 -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의 제목을 읽은 뒤 바로 인터넷에 들어가 하얀색 마티즈 사진을 두 장 골라 바탕화면에 깔아 놓았다. 관련된 사진이나 그림을 쳐다보면서 글을 읽으면  느낌이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백색 마티즈는 생각보다 작고 한눈에 봐도 실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셰어링 서비스를 통해 이 차종을 직접 운전해 본 적이 있는데도 그랬다.


요조 작가의 글을 읽으며 같은 영화를 봐도 이렇게 느끼는 포인트가 다르구나, 하고 감탄했다. 물론 나도 가후쿠가 아내의 죽음 뒤 혼자 타를 몰고 달리는 모습을 좋아했다. 충실한 운전자 미사키가 생긴 뒤로는 뒷좌석에 앉아 연극 대사를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따라 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연극 <바냐 아저씨> 연습을 통해 알게 된 이유나의 언어 문제(말을 못 해 수화로 대화하는 데다가 일본에 살면서도 일어를 익히지 않아서 남편 공윤수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는 그렇게 깊게 생각하진 못했던 것 같다. 궁금해서 내가 이 영화를 본 다음 날 썼던 리뷰를 에버노트에서 찾아 다시 읽어보았다. 나는 원작의 아우라에 휘둘리지 않고 하루키의 여러 단편들을 마음대로 조합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배포와 뛰어난 구성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특히 죽은 아내 오토와 잤던 젊은 배우  다카츠키가 가후쿠에게 '전생이 칠성장어였던 여자 이야기'의 후반부를 들려주는 장면에 놀라워했다. '그래, 원작 소설로 영화를 만들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하면서.


연극 '바냐 아저씨'  마지막 부분엔 조카 소냐가 바냐 아저씨를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소냐. 길고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가자고 속삭이는 소냐. 객석에서는 가후쿠의 운전사 미사키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고 스크린 밖에서는 요조가 그 장면을 보며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차 마티즈 안에서의 대화를 생각한다. 그것은 예술과의 대화였다. 자신이 무너졌을 때 다시 일으켜준 책과 자신이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게 도와준 음악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차 안에 혼자 있을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내가 좋아했던 영화와 음악이 함께 타고 있었고 지난날 좋았던 추억이 함께 달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면 회색으로 변하는 아스팔트의 무심함도 옆에 앉아 있었다. 요조는 살아가면서 가끔은 꼭 필요한 '침묵'이 각자의 차에 함께 타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좋은 글이란 이런 것이다. 나도 갑자기 혼자 운전을 하고 싶게 만드는 글. 나아가 읽고 나면 뭔가를 하고 싶게 만드는 글. 지난주에 있었던 요조 작가의 북토크에 가고 싶었는데 못 갔다. 생각해 보니 책을 읽고 리뷰도 안 썼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아무 데다 펼쳤다가 이 꼭지를 읽고 리뷰를 쓴다. 거짓말이 아니라 이 책은 어떤 꼭지를 읽든 이 정도 분량의 리뷰가 나온다. 다만 그러면 아무도 안 읽을 테니 이 정도에서 참아야 한다. 이미 읽으신 분들이 많겠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권한다. 요조의 산문집  『만지고 싶은 기분』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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