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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r 11. 2023

고전을 가지고 노는 재미

고선웅의 《회란기》


그리스 고전이나 중국 고전은 말 그대로 이야기의 보물창고다. 배신과 사랑, 질투, 욕심, 거짓말, 전쟁 등 인간이 만들어내는 오욕칠정의 드라마는 이 천 년 전이나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서 소포클레스의 뒤를 이어 셰익스피어, 브레히트, 우디 앨런,  캐네스 브래너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를 ' 이야기 학교'의 동기동창생으로 만든다.

'회란기'라는 연극 제목이 뭘 뜻하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마방진이라는 극단 이름과 고선웅 연출만 믿고 예매를 했다. 물론 그런 선택은 전적으로 아내 윤혜자의 것인데 그 판단은 이번에도 옳았다(우리 집 연극 리스트 선택과 티켓팅은 전적으로 아내가 주도한다. 티켓값도 아내가 낸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아내가 시키는 날 스케줄을 비워 함께 극장에 같이 가는 것뿐이다).

출생의 비밀이라든가 생모 찾기 등 아침 드라마에 등장하는 닳고 단 테마의 원형은 '솔로몬의 선택'이라는 고전에서 출발한 것이다. 서로 자기가 아이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두 연인에게 '아이를 찢어 반이라도 가져가'라고 하면 마음 약한 쪽이 먼저 포기하게 되는데 바로 그때 포기하는 자가 생모라는 설정 말이다. 연극 '회란기'의 제목은 바로 이 아이 잡아당기기를 하는 '흰색의 원'에서 나왔다. 1200년대 중국 원나라 때 극작가 이잡부가 쓴 이 원작 희곡은 브레히트의 극본 《코커서스의 백묵원》을 탄생시켰다고 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잿빛(灰)으로 가로막은(闌) 동그라미의 기록(記)'이나 '백묵원: 백묵으로 그은 동그라미'나 다 같은 뜻이다. 아이를 하얀 동그라미 안에 넣고 잡아당기며 생모를 가리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이 아니고 '어떻게'다.  《조씨고아》라는 걸출한 연극을 우리에게 선물했고 《찻집》이라는 연극은 낭독만으로도 관객을 몰아지경에 빠트렸던 연출가 고선웅이 이번에 선택한 전략은 경극과 신파극을 모티브로 한 과장된 대사의 향연과 고전 캐릭터들에게 입힌 현대의상의 부조화, 그리고 차갑고 적나라한 농담, 익살스러운 방백 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의 쾌감이다. 여기에 인형으로 만들어진 남자아이와 역시 인형으로 등장하는 앵무새가 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엔 포청천 역을 맡은 배우 호산의 목소리로 "이 연극엔 몽둥이로 패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소리만 요란할 뿐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저희가 다 실험해 봤으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도 나온다.

가난 때문에 주인공 장해당을 어머니가 기생으로 팔아넘기는 이야기와 룸살롱 좋아하던 지방 유지 마원외와의 결혼, 첫 번째 아내인 마부인과 장해당의 출산 등 이야기의 씨앗을 뿌리느라 다소 지루했던 1부와 달리 포청천이 등장하는 2부부터 연극은 아연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큰칼을 쓰고 매를 맞는 장해당의 억울한 상황 묘사도 일품인 데다가 포대인(포청천)이 등장해 정부와 짜고 남편을 독살한 뒤 장해당의 아이까지 가로채려 하는 마부인의 거짓말을 가려내는 장면들이 통쾌함과 웃음을 동시에 선사하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극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마음껏 상상력을 펼치는 고선웅 연출을 믿는 까닭인지 장해당과 포청천 역을 맡은 이서현과 호산의 연기 또한 뛰어나다. 다른 배우들도 조금 더 유머 감각을 살렸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았다. 고전이라지만 휑하게 뚫린 무대에서 아무런 세트도 없이 오로지 대사와 몸짓 만으로도 두 시간이 '순삭'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공연을 보고 나오는데 로비에서 어떤 여성이 "저, 교수님..."이라고 나를 부르길래 누구냐고 물었더니 서울여대에서 카피라이팅 수업을 듣는 학생인데 지금 두산아트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주 수업 시간 마지막에 "평소에 안 하던 짓도 하며 살아야 한다."면서 연극 《한남의 광시곡》을 소개하고 나중에라도 꼭 보라고 했는데 그게 말뿐이 아나라 실천적인 면까지 보인 것 같아서 살짝 흐뭇한 마음이 되었다. 나는 그 학생의 이름을 물어 에버노트에 적었다. 뭐, 점수를 더 잘 주려고 한 건 아니고 다음 주에 수업 가서 자랑삼아 얘기하려고 하는 짓이다. '회란기'는 2023년 4월 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상연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강추다. 아, 글쎄 마방진에 고선웅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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