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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pr 16. 2023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 뒤풀이 스케치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눈물을 흘리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연극이 끝났는데도 배우들이 여전히 눈물을 흘리거나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고 감동을 나눈다면 이건 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어제 대학로 자유소극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연극이 모두 끝났는데도 관객들은 움직일 줄을 몰랐고 주연 배우는 "오늘 막공인 배우들도 있고 해서 잠깐 인사를 드리기로 했으니 덥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는 안내 멘트를 했다. 이어 아버지 역할을 맡은 장용철 배우가 나와 "이 연극을 하면서 정말 많이 웃고 울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나무는 정면이 없다...'로 시작하는 김용택의 시를 낭독했다. 이 날을 위해 미리 스마트폰에 넣어 온 것이다. 한 편의 연극을 마친 사람이 시를 낭독하다니 독특한 퍼포먼스였다. 이어 엄마 쿄코 역할을 맡은 송희정 배우가 나와 "30년 연극을 했는데 이 작품을 하면서 그 세월을 보상받은 것 같다"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도대체 어떤 연극이길래 배우들이 이런 상태란 말인가 하고 궁금해질 것이다.


어제인 토요일은 우리 집에 모여서 책을 읽는 '독하다토요일' 행사가 오랜만에 열리는 날이었고 이어 저녁엔 대학로에 가서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를 두 번째로 보는 날이었다. 이 연극은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김보나 배우가 나오는 작품이고 또 변영진 감독의 연출작인 데다가 원작 극본이 일본에서 신인상을 받았다는 점에 이끌려 보러 갔었다. 일본 교토의 작은 집에서 일어나는 고등학생들의 학창 시절을 다룬 이야기는 몇몇 등장인물의 죽음과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퀴어, 전쟁, 윤리, 언어철학, 이별, 죄책감과 위로 등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연극이 끝나자마자 너무 좋은 작품이라는 데 합의하고 다시 표를 예매했다. 두 번째 연극 관람은 언제나 보는 맛이 각별하다. 전체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으니 신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조망할 수 있을뿐더러 몇몇 달라진 캐스팅이 주는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엔 토루 역의 유희재 배우는 그대로이고 요시오 역이 김바다에서 도예준으로 바뀌었는데 나는 이전보다 컨디션이 좋아서인지(그전엔 테니스엘보 주사를 맞아 아픈 팔을 끙끙대며 보았다) 이번 배역이 더 좋았다. 타쿠지 역의 박한근도 정말 좋았다(아내 옆에 혼자 온 여성 관객이 박한근 배우 팬이라고 밝혔는데 열세 번째 관람이라고 해서 우리의 기를 죽였다).


배우들의 인사가 계속될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는데 유희제 배우가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얘기를 하다가 울컥 눈물을 터뜨릴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유희재는 예전 변영진의 연출작  《이카이노 바이크》 때도 느낀 것이지만 정말 배역 속으로 빠져드는 연기자다. 이번에도 짧은 헤어스타일은 너무나 토루 역에 딱이었다. 그는 "영진이 형이 저한테도 많이 혼이 나지만..."아라고 너스레를 떨다가 내년엔 자기 몸을 갈아 넣어서라도 이 극을 다시 한번 무대에 올리겠다고 맹세를 해서 큰 환호를 받았다. 진심이 느껴지는 찡한 순간이었다.

 일본에서 날아온 원작가 핑크지저인3호가 통역과 함께 나타나서 소감을 얘기했다. 작가는 이번 공연이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밝히면서 "이 이야기는 5년 전에 쓴 것이다. 다시 보니 신기히더라. 내가 그때 이런 걸 생각했었구나...  5년 전의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라는 얘기를 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작가도 자신이 쓴 이야기의 내용이나 주제는 기억하고 있지만 그걸 시작한 발화점은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그건 그 순간에만 알 수 있는 거구나. 이야기를 만나는 건 주제도 필력도 아닌 시간성의 문제구나. 오늘 아침에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하고 있는 글쓰기도 이런 통찰은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열심히 에버노트에 생각난 것들을 메모했다.


요즘은 연극을 자주 보는 편인데 그래도 이런 연극을 보면 신이 난다. 우리는 밖에서 김보나 배우를 기다렸다가 만나 인사를 하고 사진도 찍고 하다가 다음 주부터 여행을 간다는 김보나 배우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 이 연극의 음악을 맡은 뮤지션 도담도 잠깐 나와서 인사를 했는데 아직 20대인 이 친구, 아무래도 천재인 것 같다. 음악도 너무 좋고 심지어 비주얼도 좋다. 도담의 'FFL'이라는 곡을 꼭 한 번 찾아서 들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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