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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pr 21. 2023

어느 시대에 일어나도 전쟁은 구체적 비극인 것을

국립극단 연극 《몬순》리뷰

“적진 폭격하는 걸 모니터로 지켜보니까 처음엔 끔찍하더니 나중엔 그게 재밌게 느껴지더라고. 전자오락하는 것처럼.”

이것은 이십여 년 전 어느 세미나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백기완 선생에게 직접 들은 '걸프전 관찰기'의 한토막이다. 당시 나는 그걸 들으며 인터넷과 첨단 기기 발달로 현장성이 사라지는 현대전을 백 선생이 참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코 전쟁은 그런 게 아니라고 2023년도에 외치는 젊은 작가를 만났다. 국립극단이 제작한 연극 《몬순》의 극본을 쓴 이소연이다.


젊은 작가가 전쟁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선택한 것도 놀라운데 그걸 전혀 상관없는 사건이나 인물들과 유기적으로 연결해 형상화하는 능력에 더 감탄했다. 이소연은 전쟁을 겪고 있는 가상의 국가를 설정함으로써 구체성의 한계에서 벗이남과 동시에 대학원생의 주제 발표, 유학생과 함께 사는 무기상과 그 아들, 퀴어 축제를 염두에 두고 극본을 쓰는 유치원 교사 등을 등장시킴으로써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에 연루되어 있는 젊은이들의 고뇌와 딜레마를 파헤친다.

메인 무대와 계단, 난간, 모바일 디바이스 화면 등을 이용한  무대 구성은 겹치는 동선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연극에 등장하는 자잘한 소품과 대사들이 주는 상징성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깨닫게 해주는 친절함을 발휘한다. 그 위에 신정연, 김예은, 권은혜 등 배우들의 열연이 합쳐져 아주 완성도 높은 연극이 탄생했다. 특히 유치원생 굴 역할을 맡은 강민재는 어른 배우들의 위력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극이 모두 끝나고 백성희장민호극장을 나서 길을 건너는데 강민재 배우가 엄마로 보이는 분과 함께 무심히 횡단보도를 건너 귀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와 함께 길을 걷던 관객 중 한 사람은 "어머. 쟤야, 쟤!" 하며 반가워했다. 그것은 배우를 무대 밖에서 만났다는 신기함을 넘어 좋은 연기를 펼친 배우에 대한 응원이 틀림없었다.


지금도 튀르키예-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만으로 남의 일처럼 여기기 십상이다.  이소연 작가와 진해정 연출가는 처음엔 전쟁을 직선으로 내리는 비처럼 생각했는데 본질을 계속 탐구하다 보니 차라리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몬순의 바람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극의 제목을 그렇게 정했다. 바로 현장에서 비를 맞는 사람뿐 아니라 멀리서 불어 닥치는  비바람에도 우리의 영혼은 저마다의 무게로 상처받는다. 2차 대전이든 우크라이나전이든 그 어느 시대에 일어나더라도 전쟁은 늘 구체적인 비극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특히 극본이 뛰어난 작품이다.  이 극본은 전쟁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면에서도 뛰어나지만 어떤 주제를 어떤 식으로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통찰력 부분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덕분에 오늘 밤은 '여기가 전부가 아니다. 더 먼 곳을 상상하자'라는 이소연 작가의 간절한 제안을 머리와 가슴에 새기며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국립극단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 이 연극도 강추다. 5월 7일까지 서울역 뒤에 있는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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