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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08. 2023

아듀, 백성희장민호극장!

연극 《보존과학자》와 극장 폐쇄 소식

연극은 일곱 시 반 시작인데 '입장은 일곱 시 십오 분 마감'이라며 극장 직원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로비에 있는 관객들을 몰아세웠다. 어제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계동은 서울역 뒤쪽이다. 나도 매번 가면서 동네 이름은 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시 만나요, 서계동'이라는 입간판 덕분이었다. 직원들이 이렇게 서두른 이유는 연극 시작 전 주최 측의 간단한 인사와 행사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내가 국립극단 회원이 된 이후 자주 드나들었던 백성희장민호극장이 어제 마지막 행사를 한 것이다. 오는 6월 18일까지만 영업을 하고 극장이 폐쇄된다. 우리는 '유료회원'의 자격으로 연극과 행사에 초대를 받은 듯했다. 무료임에도 불구하고 좌석도 아주 정중앙이었다. 아내는 "내가 이 극장에 쓴 돈이 얼만데."라며 웃었다. 극장으로 들어오기 전 권은혜 배우와 마주쳤는데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주었다. 지난주에 연강홀에서 《20세기 블루스》를 보고 나오다 공중전화박스 앞에서도 인사를 했었다. 권은혜 배우는 볼 때마다 참 멋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빨간색 깡통처럼 생겼던 극장 건물은 없어지고 3년 뒤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그동안은 홍익대학교 대학로 예술센터소극장에서 연극 무대가 펼쳐진다. 우리 집과 가까워지는 건 좋지만 그래도 역시 섭섭하다. 마주 보고 있는 백성희장민호극장, 소극장 판은 물론 그 사이에 놓인 커다란 나무 의자와 탁자도 우리가 사랑하는 공간이었다. 서울역에서 내려 걸어오던 긴 계단도 추억이 될 테지. 7시 15분이 되자 김광보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무대로 올라와 고정 팬들에게  "온 국민이 연극을 보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노력하겠습니다"라는 인사말을 한 뒤 극장 이름이 지어질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장민호 선생이 한 살 위이긴 하지만 'Lady first'라며 백성희 선생 이름을 먼저 오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장민호 백성희 두 분은 모두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 연극계에서 활약하던 원로 중의 원로들이셨다(두 분 다 돌아가셨다). 김광보 감독에 이어 박소영 제작 PD가 나와 대학생 때 인턴으로 들어온 국립극단에서 청춘을 불사른 이야기를 하며 극단과 관객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연극이 끝나고 나갈 때 극단에서 마련한 선물들을 꼭 받아 가시라는 안내도 잊지 않았다. 뜨거운 박수 속에 짧은 행사가 끝나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연극 《보존과학자》는 천 년 후에 지구 위에 살아남은 단 한 사람의 여성을 '보존과학자'로 설정한 SF물이었다. 유물보관소에 있던 TV 한 대가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 중 하나였을 것이라 믿는 보존과학자와 그냥 TV가 좋아 TV 속으로 들어가 TV가 된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다소 관념적이고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은 극본이었다. 다행히 모든 배우의 연기가 고르게 뛰어나서 두 시간이 지루하지 는 않았다(남자 역할을 맡은 배우만 유독 연기를 못했다). 연극이 끝나고 나오자 김광보 감독이 서서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극장 건물 모습이 새겨진 커다랗고 멋진 에코백을 선물로 받았다. 기다랗고 날렵한 장우산도 받았다. 애코백 안에는 배지와 메모리 카드, 책 커버 등 아기자기한 선물들이 들어 있었다. 극장과 극단 측의 정성이 느껴지는 선물 꾸러미였다.  아, 류진아 선생 만나 얘기도 해야겠다. 류 선생도 워낙 공연을 많이 보는 분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어제 극장에서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이런 과정 자체가 큰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신경을 쓰고 스케줄을 확인하며 티켓을 예매하고 그 날짜에 맞춰 극장으로 달려가고 로비에서 우연히 친구들을 만나 반가워하는 것은 연극이나 콘서트를 보는 일 못지않게 뿌듯한 일이다. 우리 커플은 남들이 극장에 가지 않는 코로나 19 발생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청개구리 심뽀 덕분에 인생에 즐거움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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