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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12. 2023

기대 이상으로 재밌고 많은 걸 보여주기도 했던 작품

모크-다큐멘터리 연극 《 대학과 연극》

솔직히 보러 가기 전까지는 약간 걱정하고 있었다. 지방대학의 연극영화과에서 4 년간 '비정년트랙'으로 교수를 하다가 온 극작가 겸 연출가가 동료 배우들, 학생들을 동원해 만든 치사하고 치기 어린 자기변명이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런 리뷰도 있었다('아주 기분 나쁜 연극') 하지만 막상 극이 시작되자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현실과 메타를 오가는 자유로운 극형식이 그런 걱정을 떨쳐 주었고 130분이 그냥 휙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대학과 연극'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지방대학 연극영화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드라마화함으로써 연기 입시 제도와 사교육의 관계, 지방대와 수도권의 격차 문제, 대학 교육자 고용과 노동 문제, 어느 시기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전국의 연극영화과 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게 가능했던 건 실제 극본과 연출을 맡은 성기웅이 나와 PPT로 연극의 개요를 설명하기도 하고 성기웅의 분신인 성기린이 나란히 서서 대화를 주고받는 등 시공간을 초월한 '모크-다큐멘터리' 구조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전임과 시간강사 사이에 있는 '비정년트랙'이라는 꼼수 덕분에 미래도 보이지 않고 돈도 적게 받는 교수님이 된 성기웅의 예술가적 고뇌도 공감이 가지만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들어 온 학생들(연극영화과 전국 평균 경쟁률은 141:1)이 학교에 와서 맞닥뜨리는 불안과 실망감도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모든 연극에서 '억지로 끌러 온 것 같은' 억울한 표정을 하고도 매번 연기는 참 잘하는 선명균 배우는 볼수록 매력이 있다. 드랙퀸 뮤지컬 《클럽 그웬》에서 잠깐 도와 달라는 후배들 말에 속아 계속 그 연극에 출연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유종연 배우도 너무나 좋은 연기를 펼쳤다(아내는 유종연 배우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링크를 따라 들어가 할인 티켓을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와 나를 언제나 좋은 연극으로 이끌어 주는 김세환 배우 역시 적재적소에 나타나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기다란 철사에 매달린 종이 가면들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는 사학 재단의 꽉 막힌 행정과 비리 장면도 재밌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줌으로 진행되는 교직원 회의가 끝나고 줌 어플을 어떻게 끄는지 몰라 헤매는  서나영 배우의 연기는 너무나 웃긴다. 재단이사장의 젊은 딸이 새 총장으로 임명되어 학교를 둘러볼 때 화장실이 고장 나 오줌이 넘치자 그 위로 나막신을 신고 돌아다니던 유종연 배우 등장 씬도 익살과 헛웃음을 넘나든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넘쳐 나는 걸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누군가 이걸 글로 쓰고 연극으로 만들어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객석에 앉아 편히 볼 수 있는 거야, 쪽으로 생각이 미치자 기록과 창작의 힘이란 얼마나 센 건가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연극이 끝나고 운 좋게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연극을 만들게 된 계기나 여러 가지 뒷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단 성기웅 연출과 선명균 배우, 유종연 배우 등이 모두 대학 때부터 친하던 사이였다. 그들이 예전에 함께 출연했던 대학극의 스틸 사진을 보는 맛이 남달랐고 김세환 배우가 속해 있는 극단 '드림플레이'의 김재엽 연출이 성기웅 연출과 일 년 선후배 사이라는 것도 TMI로 알게 되었다. 막간에 등장하는 성기웅과 미국에 있는 후배와의 화상 통화는 진짜인지 페이크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였는데 관객들의 질문을 통해 그게 작년 첫공보다 더 진보된 장치였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초시계를 틀어 놓고 작가와 배우가 번갈아 등장해 대사를 하는 시퀀스들은 정말로 '3분 발언대'를 통해 시간을 정밀하게 재가며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가장 감동스러운 것은 많은 배우들이 등장해 동시다발적으로 독백을 하는 장면에서 어떤 대사가 들려야 하고 어떤 대사들은 맞물리면서 안 들려도 되는지를 일일이 신경 써가며 조절하고 세밀하게 연습했다는 사실이었다. 잠깐 지나가는 장면도 이런 미시적 집중과 선택이 있었음을 알게 되자 며칠 밖에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연극이라도 최선을 대해 준비하는 연극인들의 고뇌와 사명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마두영 배우기 사회를 봤는데 관객의 질문이 한 사람에게만 쏠리지 않도록 안배를 잘해주는 진행자였다. 나는 손을 들고일어나 장강명 작가의 르포 『당선, 합격, 계급』을 예로 들며 전국에 있는 수많은 연극영영화과 학생들의 수를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며 그들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큰 질문을 던졌고 성기웅 연출은 지방대 학과가 자꾸 없어지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걱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상보다 훨씬 좋은 연극을 보고 나면 마음이 뿌듯하고 힘이 난다. 물론 연극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 때문에 마냥 개운하지는 않다. 아, 이 연극 시작 전 화면엔 영화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미국 뉴욕대학의 티시 예술대학 2015년 졸업식에서 했던 연설이 길게 나온다. 보인다. 첫 장면에 드 니로는 "마침내 졸업을 했군요. 이제 당신은 X된 겁니다(You maid it! And you're fucked!)"라고 말한다. 그는 왜 후배들의 졸업식에 와서 이런 거친 말을 던졌을까. 예술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의대나 법대, 공대처럼 확실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니 앞으로 닥칠 온갖 종류의 '거절'을 각오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이 연설을 알게 된 것은 김호 작가의 『나는 이제 싫다고 말하기로 했다』라는 책의 북토크를 하면서였다. 이 책은 말미에 붙어 있는 로버트 드 니로의 연설문 번역 전문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있다(이 연설문의 번역은 작가가 원고에만 집중하라며 기자이자 번역가인 아내 김은령 부사장-력셔리라는 잡지를 보면 이름이 나온다-이 해주었다고 김호 작가는 밝히고 있다). 시간 되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물론 김호 작가의 설명대로 구글에 들어가 'Robert De Niro - Tisch Salute 2015'를 검색해도 동영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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