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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13. 2023

두 권이 된 시집

한강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우리 집이 졸지에 한강의 시집을 두 권이나 보유한 곳이 되었다. 며칠 전 없는 줄 알고 도서관에서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또 빌려온 것이다. 나는 아리랑도서관의 시 코너에서 한강의 이 시집을 보자마자 집어 들고 대출기 앞으로 달려갔다. 이번 달 초 대전으로 여행 갔을 때 들른 작은 서점에서 이 시집을 펼쳤을 때 맨 앞에 놓여 있던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의 충격을 잊을 수 없어서였다. 한강은 소설을 그렇게 잘 쓰더니 시마저도 이리 기가 막히는구나 뒤늦게 감탄하면서. 예를 들어, 한강은 개기일식에 대하여


태양보다 400배 작은 달이/태양보다 400배 지구에 가깝기 때문에/달의 원이/태양의 원과 정확하게 겹쳐지는 기적에 대하여

라고 쓰고 있다.

초나라에 한 사나이가 살았다/서안으로 가려고 말과 마부와 마차를 샀다/길을 나서자 사람들이 말했다/이보오,/그쪽은 서안으로 가는 길이 아니오

로 시작하는 「자화상. 2000. 겨울」은 또 어떤가.  

죽은 친구의 발인식에 다녀 오는 길에 차창 밖을 스치는 나무들을 보고는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거처럼

이라고 표현하는 시인.

사람의 몸을 떠올리면서 ' 단 한 군데도 직선을 숨겨놓지 못한 사람의 부드러운 몸'이라 표현하는 시인. 그러나 가장 따뜻한 건 「괜찮아」라는 시다.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부터 울던 아이에게 왜 그래? 하고 안타깝게 묻던 엄마가 어느 날 "괜찮아"라고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일어나는 작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인데 아, 이건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란다. 아니다. 읽지 않는 게 좋겠다. 아침부터 좋은 시 읽고 그러면 출근하기 싫어진다. 다만 나중에라도 이 시집을 펼치는 사람은 거기서 다이아몬드보다 빛나는 진실이나 진심을 한 개 이상은 파낼 수 있으리라 장담한다.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다. 장담하는 놈 치고 실속 있는 경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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