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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l 01. 2023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재밌는

극단 골목길의 《처음처럼》리뷰

극단 골목길과 박근형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만 알고 갔다. 제목이 왜 '처음처럼'일까, 신영복의 처음처럼은 아닐 테고 소주 이름에서 따왔나? 박근형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으나 이내 무슨 깊은 뜻이 있겠냐 편하게 마음먹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객석에 앉으니 우리 뒤쪽에 앉은 남녀가 "새 작품 들어갔어?" "오늘 대본 받았어요." 같은 대화를 나누는 걸 들으니 배우나 연극 관계자가 많이 온 것 같았다.


극이 시작되면 졸지에 부모를 잃었지만 돈은 많은 조카들을 거느린 고모와 삼촌이 나온다. 그들은 조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고민하다가 설날 옷 선물 때문에 서로 미워하게 된 형제 얘기를 생각해 낸다. 형제는 그 이후에도 화해를 하지 못하고 서로를 증오하던 중 인천국제공항 대합실에서 마주친다. 서로 거친 말을 내뱉던 두 사람은 여행가방을 무기 삼아 총을 쏘는 등 어린애 같은 짓거리를 하다가 결국 안전요원을 칼로 찌르는 등 공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아마존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사하라사막으로 도주 행각을 벌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둘 다 살인자가 되어 교수형을 당하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을 하나씩 할 수 있다고 하며 제공한 것이 술과 담배였다. 둘 다 하는 건 안 되고 한 사람이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술의 상표가 처음처럼이었다. '설마 저기서 연극 제목이 나온 건가?' 하고 타이틀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데 동생 역 홍명환 배우가 "미류나무 꼭대기에 코끼리 빤스가 걸려였네…에!"라고 하고는 처음처럼을 선택해 홀딱 마셔버리자 형인 김주완 배우는 담배를 선택하지만 피우지는 않는다. 연극 시작 전 안내방송으로는 '담배 연기처럼 보이나 인체엔 무해한 연기가 나는 장면이 있을 수도 있다'라고 했는데 오늘은 안 피우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여기서 살짝 연극 주제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기계장치의 베어링이 빠지는 바람에 사형이 멈춰지고 집행관 이호열 배우의 퇴근시간 때문에 두 사람이 아예 감방에서 쫓겨나는 장면에서 그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세상 일은 모두 ‘사형 집행과 베어링’ 같은 관계인 것이다. 그 어떤 중요한 일도 사소한 일로 틀어질 수 있으며 나아가 중요한 일과 사소한 일은 따지고 보면 다 무의미한 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 견지로 보면 연극의 부제인 ‘사랑은 살인이 아니다’도 그렇게 신경 써서 고민할 문장은 아닌 것이다.


감독과 작가를 겸한 박근형의 이런 황당하고 못된(?) 의도의 연극은 출연 배우들의 열연으로 인해 조금도 지루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재밌게 흘러간다. 나는 특히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빌려온 ‘도레미송’을 악에 받쳐 부르거나 고양이, 소피아 등의 역을 맡았던 조은 배우의 과장되고 진지한 표정이 너무나 좋았다. 공연이 끝나 밖으로 나오니 마침 박근형 작가가 입구 쪽에 앉아 계시길래 “연극 잘 봤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어디가 아프셨는지 예전보다 살이 좀 빠져 있었다. 상대방이 알아보든 말든 그냥 인사를 하는 건 아내와 나의 특기다.

밖으로 나온 아내가  “배우들은 이 극 전체를 다 이해했을까? 이해를 못 하면 연기를 할 수 없을 텐데.”라고 궁금해했고 나도 작가가 궁극적으로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얼른 말하면 사이가 나쁜 형제 이야기를 기본으로 세우고 거기에 온갖 이야기를 다 가져다 붙인 연극이다. 나는 인스타그램으로 찾은 리뷰 중에 '극단 골목길을 좋아해서 본 연극인데 이번 작품은 진짜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감독님, 당신이 이겼어요'라는 평도 있었다고 했더니 아내가 깔깔깔 웃었다. 설사 감독의 거대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시퀀스별로는 무서운 집중력을 보여주는 배우들 덕분에 즐겁고 밀도 높은 공연이 되었다.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으면 그만이다,라고 아내와 나는 돌아오는 길에 합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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