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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l 31. 2023

극장에서 영화처럼 본 연극

이봉련의 《햄릿》

이번 일요일은 특이하게도 온라인 상연으로 연극을 보러 명동예술극장으로 갔다. 일단 제작진이 빵빵하다. 정진새 각색에 부새롬 연출이다. 게다가  햄릿 역을 남성이 아닌 여성 배우 이봉련이 맡았다는 게 중요했다(극 중에서도 왕자가 아닌 '햄릿 공주'로 불린다). 하지만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의 배역을 뒤바꾼 '젠더 벤딩(gender-bending)'이 아닌, 배역에 있어 남녀 성별을 와해시킨 '젠더 프리(gender-free)' 공연이다. 그런데 왜 이봉련이었을까. 인터뷰를 찾아 읽어보니 이봉련 역시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왜 여자 햄릿인가보다 왜 이봉련의 햄릿인가'가 더 궁금했다고 한다. 연극을 지켜본 나로서는 이봉련이야말로 성별에 좌우되지 않고 클로디어스의 부왕 살해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왕위 계승자로서의 우울과 고뇌, 분노를 가장 잘 표현할 배우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부새롬 연출은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악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거나 성적 불평등에 대해 괴로워하는  얘기들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햄릿이 여성이어도 남성과 다를 바 없이 왕권을 갖고 싶어 하고, 복수하려는 마음은 똑같을 것이라는 부새롬 연출의 의도는 이봉련에게 그대로 흡수되었고 결과적으로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광기 어린 연기가 펼쳐졌다. 이봉련 말고도 호레이쇼로 출연한 김보나 배우의 모습은 너무 귀족적이라서 신비로울 정도다. 다른 배우들도 대사 소화 능력이나 딕션이 모두 뛰어나 서툴거나 대사를 씹어서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이 작품은 기구한 운명을 가진 작품이다. 2021년 12월 17일부터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하기로 했던 이 작품은 극장 화재와 코로나 19 발발 등으로 두 번 연기된 이후 최종 드레스 리허설까지 마친 후 공연 취소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두 달 뒤 온라인 송출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최초로 선을 보였다. 제57회 백상예술대상에 연기상을 받으러 나온 이봉련은 "공연 취소 통보를 받고 그 자리에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서 있던 배우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며 울먹였다. 공연 연습을 3개월이나 한 것도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고 하니 그 회환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나는  《그 집 빌라에서 우리는》이라는 연극에서 처음으로 이봉련 배우를 인식했던 것 같다. 포토그래퍼로 일하다가 뒤늦게 배우가 된 사람이라고 했다. 그 이후 극단 골목길의 《만주전선》이나 《코스모스 : 여명의 하코다테》같은 작품으로 친숙해졌고 최근엔 뮤지컬 《포미니츠》에서도 만났다. 물론 영화나 TV로 인기를 얻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팬으로서 기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원작이지만 정진새 작가는 이 작품을 각색하면서 현세태와 상황을 많이 집어넣었다. "역병 때문에 수업이 비대면으로 싹 다 바뀌었어. 역사적인 거리두기 중이지." 같은 호레이쇼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코로나 19 상황을 정면으로 거론했고 배우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햄릿의 입을 빌어 '예술가를 대접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얘기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에 항쟁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인간 본성을 다룸으로써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란 무엇인가 질문하고 있다.


나는 햄릿이 여성으로 바뀌면 오필리어의 성은 어떻게 되는 건가, 가 개인적으로 궁금했는데 연극을 보니 오필리어는 당연히 남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간단한 원리 앞에서 나는 왜 망설였던 것일까. 그동안 나도 모르게 학습된 왜곡되고 전형적인 젠더 의식 때문이리라. 그래서 약간 부끄러웠고 많이 뿌듯하기도 했던 연극이었다. 마음먹고 찍은 온라인 송출 공연이라 배우들의 얼굴 표정이나 눈물자국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는 이점도 덧붙이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좋은 공연을 단돈 2만 원에 보았다고 자랑하고 싶다. 그것도 아내가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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