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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08. 2023

그냥 건너뛰기엔 너무 아까운 단편소설

최은영의 「신짜오, 신짜오」

아침에 마당에 나가 김지승 작가의 『짐승 일기』를 읽다가 잠깐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는데 청주의 김해숙 선생이 올린 '중학생을 위한 한국소설 읽기' 강연 포스터를 보고 책꽂이에 가서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꺼냈다. 포스터에 있던 최 작가의 단편 「신짜오, 신짜오」를 읽기 위해서였다. 포스터에는 이 소설 밑에 '우리는 왜 반성하지 못할까? 반성과 화해를 위한 바른 자세는 무엇일까?'라는 해오름아카데미 김형준 강사의 설명이 붙어 있었는데 책을 펼쳐보니 예전에  안 읽고 그냥 건너뛴 작품이었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이 좋다고 얘기하고 다니면서도 중편 「쇼코의 미소」나 장편 『밝은 밤』 얘기만 했구나, 하는 반성이 들어 당장 앉은자리에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짜오'는 주인공 소녀가 독일에서 만난 베트남 아줌마 응웬에게서 배운 인사말이다.  어쩐 일로 독일에서 살다 한국으로 돌아갔던 소녀의 식구들은 몇 년 만에 다시 독일의 변두리 도시로 오게 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동네에서 그들의 이웃이 되어 준  베트남 호 아저씨 식구들의 따뜻한 환대와 정감 어린 음식은 이들에게 살아갈 원동력이 되었다.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만화책을 보던 시간은 커서 생각해 보면 '고작 한 명의 타인과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는 어른이 된‘ 소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다. 한창 인정 욕구가 발동하던 소녀가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어 "한국은 단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그걸 듣고 화가 난  그 집 소년 투이가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 사람들을 죽였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어른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소녀의 아버지는 전쟁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며 자신도 그때 친형을 잃었다고 했지만 '그건 학살이었다. 베트콩뿐 아니라 태어난 지 고작 일주일 된 아이와 노인들까지 학살한 구역질 나는 학살이었다'라고 냉소하는 응웬 아줌마의 표정에서는 더 이상의 환대와 따뜻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라도 사과하자는 엄마의 말에 도리어 화를 내는 아빠는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하는' 대한민국 어른 남자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불행한 어른이었다. 대학 독문과에서 만나 오래 연애하고 결혼한 엄마와 아빠는 더 이상 서로를 쳐다보는 사이가 아니었다. 유일하게 호 아저씨 집에 갔을 때만 서로 따뜻한 눈길을 주고받았는데 이젠 그것도 끝이었다. 두 집안은 그 이후로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독일을 떠났고 소녀는 따뜻한 어른으로 자라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에 엄마가 짜서 응웬 아줌마에게 선물했던 뜨개질 모자와 장갑이 응웬 아줌마에게 울음을 삼키게 했으니 아주 차갑기만 한 이별은 아니었다.


엄마가 죽고 서른셋 어른이 된 소녀가 독일에 가서 응웬 아줌마를 다시 만나 씬짜오, 신짜오 하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감동이다. 응웬 아줌마는 엄마가 선물해 준 빨간 털모자를 쓰고 있었고 어른이 된 소녀는 그때의 엄마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엄마를 빼닮아 있었으니까. 전쟁의 아픔은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갈등까지 아주 심각하지만 필요한 얘기를 멀리 독일에 가서 펼치게 한 작가의 내공이 놀랍다. 그 안엔 불행한 인생에서도 서로를 알아봐 주고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 준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한 따뜻한 통찰도 들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명랑하고 장난기 가득했던 소년 투이에 대한 해석이 있다. 큰 불행을 목격하거나 그 그늘에 놓여 있던 투이 같은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 훨씬 더 전에 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잠시 웃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이런 소년들이야말로 지상에 존재하는 천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라는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찡해졌다. 짧은 이야기 속에 많은 슬픔과 따뜻함이 함께 들어 있다. 그냥 건너뛰기엔 너무 잘 쓴 소설이다. 꼭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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