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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24. 2023

둔화된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 예술의 존재 이유다

연극 《자본3 : 플랫폼과 데이터》

필립 로스는 자신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걸 소설로 써보며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하는데 그건 김재엽 연출 겸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 땅의 페미니즘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한남의 광시곡》 같은 걸출한 연극을 만들었고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끌려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자본 시리즈'를 만들었다. 물론 작품은 허술하게 만들 수 없기에 그는 배우들과 함께 칼 마르크스의 『자본』을 함께 읽을 정도로 공을 들이며 이 시리즈를 제작했다.

어제는 그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자본3 : 플랫폼과 데이터》를 보았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배달 플랫폼과 인간의 데이터화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만큼 속도에 열광하는 사회가 또 있을까. 필요한 물건은 과일박스부터 커피까지 배달 서비스를 통해 모두 앉은자리에서 받을 수 있고 배달은 '새벽배송'이라는 이름 하에 노동력을 착취한다. 왜 착취라고 하냐면 오토바이 배달 노동자들은 일을 하다가 사고가 나도 회사에 치료비를 청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파트너라 불리지만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다. 쉽게 말하면 의무는 충만한데 권리는 거의 누리지 못하는 최하층인 것이다.


극이 시작되면 늘찬으로 분한 김세환 배우가 혼잣말을 한다. 마이스터 고등학교 동창인 민준의 빈소에 온 그는 캔맥주를 고인에게 권하며 "마이스터 고등학굔데 왜 실습은 소시지 공장으로 나가냐"며 쓰게 웃는다. 민준은 공장에서 실습 도중 사망했다. 민준의 누나 리키나 민준의 친구 늘찬이나 모두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라이더들이다. 그들은 하루 종일 AI가 지시하는 대로 배달을 다니지만 일은 고되고 사고 사망자들은 늘어간다. 하지만 배달업계 스타트업의 마틴 유 대표 같은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죽음은 안중에도 없고 유튜브 방송에 나가 스타가 된다. 여기에 실리콘밸리에서 얼굴인식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애니가 엮인다. 그녀는 미국으로 입양될 때 찍은 자신의 사진이 미국 정부의 데이터로 사용되는 것을 발견하고 회의에 젖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피가 흐르고 살이 있는 생명체였는데 어느덧 하나의 데이터로만 여겨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우리는 스마트폰 없는 세상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배달 서비스로 현관문 밖에 도착한 박스를 보고 '누군가 이걸 힘들게 들고 와서 여기 놓고 갔겠지'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김재엽 연출은 "배달이 늦으면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짜증을 내지만 길거리에서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배달 노동자들은 모르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라는 이중성에서 이 연극의 모티브를 잡은 것 같다. 그만큼 직접 얼굴을 보는 것과 AI를 통한 접촉엔 온도 차가 상당한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는 "라이더들은 헬멧에 가려 표정을 노출할 수가 없다. 사람의 얼굴을 직접 쳐다보는 기회를 많이 만들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애니 역을 맡은 이소영 배우도 "기계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노력을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라고 말하며 이 연극에 임하던 마음 자세를 밝혔다. 그녀는 영어 원어민 연기는 물론 애플리케이션을 상대로 대사를 하는 일이 많아서 연기가 더 어려웠다고 하며 웃었다. 극단 드림플레이의 대표적인 배우 여섯 명이 열연했는데 관객과의 대화에선 마틴 유 역을 맡은 이태하 배우까지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제 관객 중엔 얼굴인식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분이 계셔서 흥미로운 질문과 대답을 나눌 수 있었다. 김재엽 연출은 언제 그분을 따로 인터뷰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배우 스태프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연극이야 말로 이런 생각들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인 것 같다."라고 심회를 밝혔다. 지난 관객 중엔 차라리 다큐로 만들지 그랬냐는 의견도 있었다지만 다큐멘터리는 흥미가 떨어진다는 선입견이 있어 관객들에게 외면을 받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극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술이 하는 일은 둔화된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던 김재엽 연출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밤이었다. 예술은 먹고사는 데 하등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인생에서 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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