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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30. 2023

이미 매진이지만 그래도 보라고 권하고 싶은 연극

《집에 사는 몬스터》

어제는 조금 미친 짓을 했다. 공연을 하루에 두 편이나 본 것이다. 오후 3시에 국립극장에서 창극《심청가》를 보고 이어 LG아트센터에 가서 《집에 사는 몬스터》를 보았다. 문제는 LG아트센터가 마곡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다. 창극 공연이 끝나자마자 셔틀버스를 타고 전철역으로 가서 서울역까지 간 뒤 부지런히 공항 가는 전철로 갈아탔다. 좌석 배정이 비지정석이라 시간 맞춰 입장하려면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배고픔을 참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집에 사는 몬스터》는 스코틀랜드의 극작가 겸 연출가 데이비드 그레이그의 작품이라 나도 관심이 있었고 또 아내가 타임 세일 덕분에 티켓을 저렴하게 예매했다고(1인당 2만 원!) 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객석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연극엔 딱 네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데 일단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16세 소녀 덕의 캐릭터가 매우 웃기고 재미있다. 덕은 죽은 엄마가 즐겨 타던 오토바이 ‘듀카티’ 덕분에 붙은 이름이다. 집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작명법이다. 아빠 휴는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려 말도 어눌하게 하고 마리화나를 낀 채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완전 사회부적응자로 지내는데 급기야 눈까지 안 보이는 신세가 된다. 우리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영국은 이런 경우 아이를 보호 시설로 보내는 모양이다. 어느 날 덕이 일어나더니 아빠에게 외친다. “오늘 그 여자가 오는 날이야!” 사회복지사가 와서 엉망인 집을 보면 자기를 보호 시설로 끌고 갈지도 모르니 청소를 하고 일상생활도 정상인 척 연기를 하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빠를 추궁하는 대사들이 너무 웃긴다. 밤마다 잠을 안 자고 간식과 맥주를 챙겨 PC 앞에서 밤을 새우는 걸로 봐서는 포르노를 보는 것 같으니 지울 수 있도록 어서 그걸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혹시 동물이랑 하는 거야?”라는 저열한 의심까지 한다(아빠는 할 수 없이 밤새 롤 플레잉 게임을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데 이건 나중에 큰 복선이 된다).

매일 아침 소설을 쓴다는 이 조숙한 소녀는 이런 식으로 어른스러운 척을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반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애’ 로렌스를 보자 즉시 어리버리했던 본모습으로 돌아가 버린다. 로렌스는 자신이 게이라고 의심하는 친구들에게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덕에게 모종의 부탁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또 갑자기 찾아온 의문의 여성 아그네사,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사회복지사 린다까지 섞이는 바람에 집안은 아주 난장판이 된다. 참, 중요한 얘기를 빠트렸다. 이 연극엔 아무 데나 나타나 덕과 대화를 나누는 몬스터도 한 명 나온다. 이름은 없다. 원작을 쓴 데이비드 그레이그는 대본에 화자를 하나도 표시해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배우와 연출자의 자발적인 해석과 참여의 기회를 열어 놓은 것이다.


이 연극의 무대는 십자형 복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배우들은 X축 또는 Y축에서 나타나 돌아다니며 대사를 한다. 덕이 아침에 일어나 소설을 쓰던 창문과 책상 위치도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한다. 그러니까 관객은 전통적인 앞모습이 아니라 앉은자리에 따라 누군가는 뒷모습을, 누군가는 옆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배우들은 사방팔방 돌아다니고 몬스터 역을 맡은 남미정(남권아라고도 부른다, 개명을 한 모양이다) 배우는 심지어 비계를 타고 허공에 올라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객석은 '일반석'과 '몬스터석'으로 나뉘었는데 배우들이 개입하는 몬스터석이 조금 더 비쌌다(종이팔찌를 안 차고 몬스터석에 앉아 있다가 시작 직전 적발되어 일반석으로 간 관객이 세 명 있었다). 승려복을 입고 몬스터석에 혼자 앉아 진지하게 연극을 관람하던 스님 한 분이 단연 눈에 띄었다.

덕 역의 이지혜 배우의 연기는 정말 최고였다. 안경을 벗고 머리를 흔들라는 주문에 어설프게 머리를 흔들거나 중간에 "비트 좀 주세요."라고 하고는 랩을 하다가 금방 포기하는 장면은 정말 웃겼다. 대사 처리 미숙 등의 실수가 조금씩 있었지만  아빠 역의 김은석 배우, 로렌스 역의 이종민 배우도 잘했고 아그네사, 린다, 그리고 몬스터 역까지 일인삼역을 해낸 남미정 배우는 혼을 불태우는 연기를 보여줬다.  알고 보니  이 연극은 몇 년 전 동안연극제에서 연출상·작품상을 휩쓴 작품이었다. 아침에 임지민 연출을 유튜브로 검색해 보니 배우들이 "너랑 작업하면 내가 진짜 아티스트가 된 느낌이야."라는 소리를 한다는 멘트가 있었다. 즐겁게 진행하지만 집요함을 포기하지 않는 임지민 연출의 스타일을 대변하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끝으로 데이비드 그레이그(David Greig)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배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시소 위에서 연기를 펼치는 《노란 달》이라는 작품으로 이 작가에 입문했는데 그 해 최고 히트작인 《터칭 더 보이드》 그리고  《카사노바》역시 이 작가의 작품이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데 '시대상을 담보하는 진지한 연극과 정치적· 사회적 비판을 담는 동시에 유머와 따뜻함까지 갖춘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집에 사는 몬스터》가 끝나고 객석을 나서다 몬스터석을 보니 스님 관객 말고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지현준 배우였다. 생각해 보니 그는 데이비드 그레이그의 《카사노바》에서 타이틀롤을 맡아 미친 연기력과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바로 그 배우 아닌가.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할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가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얘기를 전에 어디서 들었기 때문이다. 10월 3일까지 LG아트센터 유플러스스테이지에서 상연한다. 이미 매진이지만 그래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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