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Oct 09. 2023

아주 오래된 새로움

김우옥 연출의 실험극 《겹괴기담》

학문이나 예술 등에 '현대'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어려워진다는 건 학계의 유명한 정설이다. 나는 특히 현대 예술은 너무 어려워서 장르를 막론하고 작품 하나당 하나의 '발명'과 맞먹는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예를 들어 화가라고 하면 예전 화가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됐지만 지금은 그러면 안 된다. 자신의 그림이 뭐가 새로운지, 그동안의 작품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라'를 잘 풀어야 업계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데이미언 허스트 같은 작가의 작품이 고층 빌딩보다 비싸게 팔리는 이유는 작품성만큼이나 구라를 잘 풀기 때문이리라.


사설이 길었다. 어제 김우옥 연출의 《겹괴기담》을 보았다. 1978년 뉴욕 오프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던 이 작품은 두 개의 이야기를 불친절하게 겹쳐 놓은 작품이다. 즉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상황이 겉으로는 같지 않지만, 결국 같은 사건들이 같은 순서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제목만 해체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겹(겹쳐진) 기담과 괴담'이라는 뜻이니까.

 1982년 ‘겹괴기담’ 등 세 편의 실험극을 연출한 김우옥은 당시의 차가운 반응을 보고 구조주의 연극에 대한 꿈을 접고 청소년연극에 몰두했다고 한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이 하면 뭐가 달라도 다르기 마련이다. 그는 '방황하는 별들' 등 별 시리즈로 청소년극 돌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제 구순의 나이가 되어 다시 마이클 커비의  그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린 것이다. 초반의 차가웠던 반응과  달리 20여 년이 지난 2022년에 이 작품은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선정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이 작품은 어렵다. 아내는 두 번째 보는 것인데 처음엔 보이지 않던 전체 구조를 알고 보니 훨씬 재밌었다고 한다. 물론 검은 장막을 드리운 무대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관객이 쳐다보는 구조라든지, 비 오는 날 어떤 장소를 찾아오는 여자를 안내하는 사람들이 왜 맹인이나 농인인 척해야 하는지, 온전한 대사가 들리기 전에 왜 분절된 장면으로 그 대사와 제스처를 먼저 목격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말끔히 풀리지 않지만.


연극이 끝나고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젊은 연출가와 작품에 대해 몇 마디 소감을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연극을 잘 봤지만 과연 이 작품을 새롭다고 해야 할지 몰라 괴롭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나는 역설적으로 의문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이 연극은 '오래된 새로움'이다. 새로움은 언제나 우리 뇌를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하고 쉬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음식으로 치면 설탕이나 마찬가지다. 달콤한 것만 먹는 몸엔 발전이 없다. 김우옥 연출이 우리에게 이 연극을 보여주는 것은 이런 '태도'에 대한 일침 아니었을까. 이는 극장 로비에서 틀어주던 그의 인터뷰 영상에서도 드러난다(그래서 저는 MZ세대뿐 아니라 나이 든 분들에게도 이 기회에 색다른 연극을 한 번 봐주십사 하고 부탁도 하고 협박도 하고 그러는 겁니다).


아침에 인터넷으로 김우옥의 인터뷰를 찾아 읽어보니 그는 2010년 뉴욕에서 열린 실험예술축제에서 85세의 피터 부룩이 참여해 누구보다 뛰어난 작품을 선보이는 걸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것만 봐도 어떤 일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데 나이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나 또한 90세의 김우옥에게서 새로움에 대한 생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니까. 젊은 사람에게서 받아야 할 새로움에 대한 자극과 영감을 90세 노인에게서 받다니, 놀랍지 않은가. 러닝타임 80분. 2023년 10월 6일부터 10월 9일인 오늘까지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짧게 상연한다. 즉, 오늘, 오후 3시가 마지막 공연이다. 서두르면 보실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방 예술극장에서 만나는 연극의 각별한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