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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19. 2023

대량 정보에 대한 의심 혹은 반성

연극 《러브 앤 인포메이션》

김지수 기자가 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어떤 남자가 산속에 있는 절로 찾아와 "스님에게 인생을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하니까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내고는 찻잔에 계속 차를 붓는 것이었다. 찻잔의 차가 흘러넘치자 스님은 비로소 말했다.  "그래. 차가 넘치지. 자네가 비우지 못하니까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야. 나보고 인생을 가르쳐 달라며? 비워야 가르쳐주지. " 이 얘기를 들려주며 이어령 선생은 김지수 기자에게 만원버스를 생각해 보라고 했다. 사람이 꽉 차서 빈 데가 하나도 없는 건 영혼 없는 육체나 마찬가지이고,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영혼이 들어갈 자리 없다고 하면서.


두산아트센터에서 본 연극  《 러브 앤 인포메이션》 리뷰를 쓰려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 에피소드가 생각이 났다. 연극은 다섯 명의 배우가 점프슈트와 티셔츠를 입고 짤막짤막 분절된 이야기 70개를 연기하는 게 전부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짧아서 대사를 하다 말고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는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제발 비밀을 얘기해 달라고 조르는 친구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얘기 안 하면 우린 말하지 못하는 게 있는 사이가 되는 거야!) 친구 다섯 명이 모여 뭔가 화면을 쳐다보며 웃는 장면도 있고 헤어진 애인이 다시 만나 과거의 기억을 좇기도 한다. 대사는 없고 자막으로만 이루어진 시퀀스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토막 난 이야기들을 보면서 어느덧 맥락을 찾으려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리플렛을 읽어보니 이 연극은 진해정 연출이 드라마터그 김민조에게 먼저 해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배우들에게도 자유롭게 문을 열어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받았다. 원작을 쓴 카릴 처칠은 1970년대부터 연극을 만들어  온 극작가인인데도 50년이나 글을 쓴 사람이라는데 아직도 이렇게 전복적인 컨셉을 구현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객석엔 연극 관계자들이 많아 보였다. 지난번 《겹괴기담》 때 보았던 '젊은 연출가'도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를 했고 우리 뒤쪽에서는 새 작품 얘기를 나누는 연출가(아마도)들의 대화 속에 김보나 배우 이름이 들려와 내심 반갑기도 했다.  


창의적이고 새롭지만 너무 짧은 이야기 형식이 반복되니까 가만히 앉아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아마  권은혜, 권정훈,  성수연 같이 노련한 배우들의 연기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무대에 올릴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마치 인스타그램 릴스를 무심코 넘겨 보다가 '근데 내가 이걸 왜 계속 보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든 느낌일 때 연극이 끝났다. 어찌 보면 이건 90분 간의 질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뇌에 저장하거나 흘려보내고 있다. 어쩐 게 더 나은 삶일까. 머릿속이 꽉 찬 상태일까, 아니면 당장의 쾌락과 궁금증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사는 것일까. 연극은 질문을 던지고 관객은 극장을 나서며 생각에 잠긴다. 영화나 드라마, 음악 등에 비해 연극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거칠고 즉각적이다. 어쩌면 나는 그래서 연극을 보는 것 같다. 매끄러운 공산품보다는 만든 이의 칼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나무 조각품을 만나는 느낌이 좋아서.  11월 4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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