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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22. 2023

시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다

맨씨어터의 연극 프로젝트 《기형도 플레이》

내가 한때 유일하게 끝까지 암송할 수 있었던 시가  ‘질투는 나의 힘’이었는데 그 시에 들어 있는 구절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는 80년대 젊은 시인들의 앤솔로지 시집 제목으로 등장한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다가 스물아홉 살에 요절한 시인 기형도는 한 권의 시집(입 속의 검은 잎)과 한 권의 산문집(짧은 여행의 기록)을 남김으로써 영원한 젊음과 우울의 초상이 되었다.


시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내러티브 형식이 아니므로 꺼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내용이 나온다. 소리꾼 이자람은 기형도의 시를 노래로 만든 적도 있고(빈 집) 이번엔 연극이다. 극단 맨씨어터의 연극 《기형도 플레이》는 그의 시를 모티브로 만든 단막극들이 모인 프로젝트다. 15년 전 죽은 옛 친구이자 애인이기도 한 남자를 찾아가며 기차 안에서 그를 추억하는 커플에겐 기형도의 시집이 각각 다른 기억으로 존재하고(빈 집), 재개발계획 발표 방송을 기다리는 부부는 불길한 꿈을 꾸고 나서 ‘나쁜 일을 하지 않아야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며 반성에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과는 기형도의 시 구절처럼 바람의 한숨 소리를 듣게 된다. 갑자기 소리를 너무 잘 듣게 된 대학생 커플은 서로의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소리에도 뼈가 있음을 알게 되고(소리의 뼈), 기차 안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내 옆자리 신사에게 건네는 군인은 그가 자살하러 가는 길이라는 걸 직감하고 조치원에서만 파는 치킨 ‘조파닭’ 이야기로 분위기 전환을 꾀한다(조치원) 그 신사는 대학 시절에 자기와 자고 싶으면 기형도의 시집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라는 어이없는 조건을 제시하던 여학생을 추억한다.


시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이렇게 작고 시시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따뜻했다. 아침에 다른 분들의 리뷰를 몇 편 읽어보니 ‘조치원’이 좋았다는 분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렇다. 박호산 이창훈 콤비의 티카티카가 밉지 않았다. 이창훈은 자연스러운 코믹 연기의 달인이었고 박호산에게는 스타의 풍미가 느껴졌다. 물론 김승은, 김세영 등 다른 배우들도 고르게 좋았는데 이는 극단의 대표이기도 한 우현주 배우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연극을 보러 가기 전 박호산에게 끝나고 잠깐 얼굴이나 보자고 카톡 문자메시지를 넣었는데 막상 나왔을 땐 팬들에 둘러싸여 아내와 나에게 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내가 두 사람 사진을 찍어 줄까 했더니 촌스럽게 무슨 짓이냐고 손사래를 치던 아내는 막상 사진을 보더니 잘 나왔다며 좋아했다.

‘질투는 나의 힘’ 등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지만 이미 매진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극단과 극장은 상연을 연장하라, 연장하라! 10월 29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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