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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30. 2023

상상력이 세상을 바꾼다

연극 《열녀를 위한 장례식》

   이야기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사람들은 이야기를 지어 무엇이 쓰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 중 하나가 어제 본 진주 작가와 이인수 연출의 ‘열녀를 위한 장례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17세기 조선에서 가장 이름 높은 책괘(지금으로 치면 도서유통업자이자 걸어다는 책대여점) 조생의 딸인 난이가 최대감 댁으로 찾아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시 정부에서는 정권을 부정적으로 다룬 책들을 금서로 지정해 놓고 그걸 유통하거나 필사는 물론 읽거나 보관만 해도 참수에 처하는 폭정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규방에 모여 이야기를 지어내는 여성들이 있었다는 설정이다. 작가는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도술과 초능력으로 남편을 출세시키고 마침내 오랑캐까지 무찌른 여인의 이야기’인 히어로 픽션 『박씨전』이 공동창작을 통해 탄생했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브런치에 ‘곰곰’이라는 작가로 활동하는 진주 작가의 글을 읽어보니 이 작품은 원래 강원도립극단에서 모집한 공모전에 제출해 우수상을 탔던 《규방–소설 쓰는 여인들》의 시놉시스였는데 후에 이인수 연출이 같이 한 번 해보자고 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발전시켜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브런치엔 이 이야기 말고도 작가가 만들거나 참여했던 작품들의 일지가 시리즈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있다. 틈틈이 가서 읽어 볼 생각이다).

규방에 모여 이야기책을 읽기만 하던 여인들은 어느 날부터 직접 이야기를 지어보자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거기에 별채에서 투명인간처럼 살던 맏아들 최헌이 끼어든다. 그는 저신장으로 태어나 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살던 장애인이었다. 가부장제의 희생자이자 이야기를 좋아하는 작가적 풍모까지 갖춘 최헌이라는 이중적 캐릭터는 실제 저신장 배우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기도 한 신강수 배우에 의해 너무나도 의젓하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물론 우리는 박소연 배우의 팬이라 갔었는데 박소연뿐 아니라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고르게 좋았다. 연극이 끝나고 로비에서 박소연 배우와 너무 좋아 팔짝팔짝 뛰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아내 윤혜자가 윤현경 배우에게 “어제오늘 두 번을 봤는데 두 번 다 연기가 너무 좋았어요.”라고 소감을 밝히자 윤현경 배우도 너무나 고마워했다. 뿌듯한 장면이었다.

      

제목에 ‘열녀문’이 들어간 것은 수절하다가 목숨을 끊은 월영이라는 여인의 친언니 운선이 동생의 죽음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생의 일기장을 찾는 과정이 주요 플롯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동창작을 하는 여인들이 가세하고 이내 이야기는 그들이 지어내는 소설 ‘박씨전’ 속으로 들어가 전쟁과 사회에 대한 스케일 큰 그림을 그려낸다. 나는 개인적으로 친정아버지의 결단에 의해 열녀문을 불태우는 장면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이라 특히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읽는 자에서 쓰는 자로 변하는 과정은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특히 사회에서 배제되었던 여성들과 장애인이 연대해 상상력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너무나 멋졌다. 사극이지만 영어만 안 나올 뿐 아주 현대적이 용어를 쓰는 것도 재밌었고 마님의 몸종조차 공동창작을 하는 현장에서는 완전하게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도 감동적있었다.      


어제는 소행성 ‘책쓰기 워크숍’이 있는 날이었는데 아내가 ‘글 쓰는 사람들이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라며 수업이 끝나고 함께 연극을 볼 것을 권했고(그제 내가 이천 가서 문학토크를 하는 동안 아내 혼자 먼저 보았음) 이에 원고를 쓰고 있는 강신수 선생과 이채선 선생이 함께 극장으로 가서 연극을 관람했다. 박소연 배우 덕분에 저렴한 가격으로 네 사람이 연극을 볼 수 있었기에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초연이라 앞부분이 좀 늘어지고 너무 긴 듯한(인터미션 포함 185분)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이야기에 힘이 넘쳐서 좋았다. 연극은 한 번의 상연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발전과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게 큰 매력이니까. 이 작품 역시 날이 갈수록 더 쫀쫀해지고 새로운 의미를 덧붙여 나갈 것이다. 아울러 진주 작가의 작품은 다 찾아보기로 했다. 전주 출신인 진주 작가는 전주의 한 커피숍에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나 적어보자’며 친구가 내민 냅킨에 ‘한예종 극작과 입학’이라고 적고 연극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글을 읽자 상상력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그의 생각에 나도 기꺼이 같이 올라타고 싶어졌다. 강추한다. 11월 5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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