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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18. 2023

김멜라 단편소설 읽고 쓰러졌어요

김멜라의 「저녁놀」

너무 웃겨서요. 김멜라의 단편 「저녁놀」은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인데 딜도가 주인공이에요(앗, 딜도라는 단어를 쓰면 또 페이스북에서 경고를 하려나요? 음란하다고). 작곡을 전공한 여자와 미술 전공의 여자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는데 둘은 섹스를 하기 위해 모텔에 가면서 자기들만의 암호를 만듭니다. 모텔은 책, 섹스는 독서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자연히 딜도는 책갈피가 되었는데 막상 이 커플이 딜도를 사놓고는 사용을 하지 않고 서랍장 깊숙이 보관만 하고 있는 겁니다. 모모라는 이름을 가진 딜도는 화가 납니다. 자기도 활약을 하고 싶은데 여자들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요. 나에게도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다고 푸념을 하던 모모는 급기야 가난한 연인이 돈을 절약하기 위해 집에서 기르기로 한 대파에게 밀려 버려질 위기에 놓입니다.

니체의 『아침놀』이라는 책과 함께 박스에 들어간 모모는 두 여자의 미니멀 라이프 덕분에 새로 태어납니다. 박스 안에서 플라톤과 쇼펜하우어, 루소, 니체 등의 책을 읽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나 사물이 주인공인 소설은 언제나 흥미로운데 이건 좀 도가 지나치게 재밌군요. 섹스로 시작해 철학으로 나감으로써 교양소설로 변신하려는 작가적 야심도 귀엽고요. 뒷부분에 니체의 문체를 흉내 낸 자서전 같은 모모의 선언문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읽었던 조침문보다 맛깔스럽습니다.


이 소설집엔 이 소설 말고도 여러 작품이 실려 있는데 표제작인 「제 꿈 꾸세요」도 물론 재밌습니다. 죽은 여자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저승사자와 뭔가를 의논하는 얘기니까요. 저는 소설가 조성기 선생의 숭실대 은퇴식에서 학생 답사 연사로 나설 때부터 김멜라 작가가 매우 웃기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조성기 선생이 자기를 부른 이유는 제자 중에 노는 사람이 자기 하나라서 그렇다고 너스레를 떤 김멜라는 선생이 답사 여행 중 멀미하는 친구들에게 수지침을 놓아준 얘기와 함께 공중부양을 시도한 얘기까지 해서 좌중을 웃겼습니다. 그 동영상은 조성기 선생의 페북 타임라인을 잘 뒤져보면 볼 수 있습니다. 퀴어 소설가로 알려진 김멜라는 '세상에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로 넘치는데 나 하나쯤은 동성 이야기를 써도 되지 않겠느냐'는 입장인데 저는 매우 찬동합니다. 저는 이번 달 '독하다 토요일' 에서 읽을 책도 이 소설집을 선택함으로써 독자 저변 확대에 힘썼다는 사실을 밝히는 바입니다. 아무튼 그러니까 이 소설집을 당장 사서 읽으시라는 얘깁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책을 읽고 또 나누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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