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너 자신이 되라》
직장 생활을 하거나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하루 몇 시간이나 일할까. 12시간 정도는 하지 않을까. 원래 인간은 이렇게 일하지 않았다. 원시시대엔 맹수에게 쫓기는 위험한 상황이 있긴 해도 하루 대여섯 시간 이상은 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그렇게 일할 거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업혁명과 포디즘 등 대량 생산 시스템이 득세하면서 우리는 일의 노예가 되었다. 열심히 오래 일하는 게 미덕이 되었고 게으른 자는 낙오자 취급을 받았다. 이게 가스라이팅이다. 예전 회사 대표는 누가 힘들다고 하면 "야, 나는 더 힘들어"라고 말함으로써 임직원의 불만을 원천봉쇄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상대방보다 더 힘들게 살았다. 혹시 내가 게으른 건 아닐까, 재산을 더 축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계속 자신과 타인을 가스라이팅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제 연극 《너 자신이 되라》를 대학로의 극장에서 보고 나오며 이런 생각을 했다. 프랑스의 극작가 겸 연출가인 꼼므 드 벨시즈가 쓴 이 작품은 락스를 만드는 회사의 대외 커뮤니케이션 업무 담당자가 신입사원 면접을 하는 과정을 그린 이인극이자 부조리극이다. 면접 담당자는 처음엔 락스 예찬을 하며 업무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것 같더니 곧 '너 자신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면서 얼굴은 예쁘냐(자신은 장님이라 앞을 볼 수 없다고 밝힌다), 섹스는 잘하냐 등등 질문의 수위가 올려갔고 결국엔 자신을 유혹해 보라는 주문까지 했다. 젊고 매력적이며 능력까지 갖춘 지원자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심오하고 황당한 질문을 해 놓고도 뽑아 놓고서는 복사나 파워포인트 작업 같은 단순 업무나 시킬 것 아니냐고 황당해하면서도 결국 면접 담당관인 여성 부장의 가스라이팅에 넘어간다. 여기서 잠깐. 앞에서 대외 커뮤니케이션 업무라고 했는데 이는 결국 광고나 홍보를 말한다. 나는 연극을 보면서 광고를 진정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에 젖었다. 내가 20여 년 간 했던 일이지만 광고는 일방적인 메시지를 교묘하게 쏘아 소비자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얘기가 잠깐 옆으로 샜다. 죄송하다.
썬글라스를 쓰고 자신이 맹인이라 우기는 여성 부장을 연기하는 전국향 배우의 관록 있는 연기도 훌륭하지만 면접 응시자로 나오는 김보나 배우의 연기는 너무나 훌륭하다. 커다란 동작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랩을 하는 장면은 너무 웃겼고 옷을 다 벗으라는 명령에 박스에 들어가 옷을 벗은 뒤 쿠션 의자 하나만으로 몸을 가리고 춤을 추는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연기 투혼이 느껴졌다. 결국 "나를 유혹해 보라"는 주문에 키스신까진 만들어 낸 인터뷰이는 일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주어진 권총으로 러시안룰렛을 하게 된다.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댄 그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신 분들은 지금 예매 버튼을 누르시기 바란다. 불어권 극단이라는 뜻의 극단 프랑코포니는 상임 연출 까디 라뺑과 이은경 평론가, 드라마투르기 임혜경 번역가 등이 모여 매년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연극을 소개하는 좋은 사람들의 모인 곳이다. 김보나 배우가 찍은 사진을 보니 극작가 꼼므 드 벨시즈가 너무 젊고 잘 생겼다. 아니다 다를까, 1980년 생의 천재란다. 2023년 12월 10일(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에서 상연한다.
(*하나 지적하자면, 연극 제목은 ‘되어라’나 ‘돼라’라고 써야 맞다. 프랑스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나 보다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