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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14. 2024

연극이 살려낸 또 한 명의 눈부신 지식인

극단 미인의 《아들에게》

 


이름이 이상하다. 미옥 앨리스 현이라니.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지식인이자 목사인 현순의 딸 현미옥은 하와이에서 태어난 최초의 한인이다. 아버지는 딸이 세계인으로 살 수 있도록 이름을 앨리스라 지어주었고 앨리스는 부모의 바람대로 세계를 날아다녔다. 열여덟 살에 상하이로 갔고 도쿄, 뉴욕, 블라디보스토크, 체코를 누볐다.  중간에 3.1 운동에 투신했던 남자와 연애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런데 남자가 바람을 피우고 시댁 식구들이 그걸 용인하자 미련 없이 버리고 상하이로 갔다. 그에게는 한반도가 좁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여성의 생애를 모르는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1990년대까지 백석이라는 천재 시인의 시를 읽지 못했던 것처럼 현앨리스라는 이름도 모르고 살았다. 연극이 이 이름을 살려냈다.


구두리 작, 김수희연출이라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한 사람이다. 구두리는 김수희의 작가활동명인데 이는 할머니의 이름이기도 하다. 작가는 희곡을 쓸 때면 할머니의 집으로 내려가곤 했는데 결국은 돌아가신 이 분의 이름을 작가명으로 쓰게 된 것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서 이상을 불태우다가 남로당 당수 박헌영과 함께 숙청당한 이 지식인 여성과 할머니가 같은 세대라 더 애틋했을 것이다.


연극을 보며 '강해진이 누구야?'라는 생각을 했다. 프로그램북을 보니 <금성여인숙> <스카팽> <금조이야기>에 나온 배우다. 아, 금성여인숙의 그 산삼 캐던 아가씨 역 배우구나. 연기를 너무 잘한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힘이 있고 매력적인 옛 서울말도 잘 구사한다. 1부가 끝날 때쯤 회전무대와 레일 위를 마구 뛰어다니는 배우를 보며 '저라다 쓰러지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에너지가 대단하다. 이 연극은 숙청당하는 날 바닷가로 끌려 온 앨리스가 겨우 살아나서  박 기자라는 남성과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연극 제목이 '아들에게'가 된 것이다. 알고 보니 박 기자는 현미옥, 그러니까 현앨리스의 아들 웰링턴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생애 전반에 개입하며 고비고비마다 그 선택의 의미를 묻는다. 이는 방대한 역사를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데 효과적이다. 임시정부 사람들과 이승만, 박헌영, 주세죽, 김단야 등 아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는 조선희의 대하소설 <세 여자>를 읽은 게  큰 도움이 되었다. 두 권짜리 이 소설, 너무 재밌으니 꼭 읽으시기 바란다. 아, 얘기가 좀 옆으로 샜다. 새벽에 일어나 의식의 흐름대로 리뷰를 쓰다 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 연극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중장기창작지원사업'이라는 긴 이름의 프로젝트 덕분에 탄생했다. 낭독극으로 먼저 선보일 때 제목은 '미옥 앨리스 현'이었는데 연극으로 올리며 '아들에게'로 바꾸었다. 아내와 나는 가끔 낭독극을 보러 가기도 하는데(티켓값도 저렴하다) 거기서 경쟁을 통해 연극으로 올리게 되는 작품들이 있고 그런 작품들일수록 우수한 경우가 많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이 연극을 하기 위해 '공산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역사학자를 초빙해 여러 차례 강연을 듣기도 하고 하와이로 워크숍을 떠나기도 했다. 그래야 현앨리스와 정웰링턴의 삶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이 170분이나 되는지 몰랐다. 그런데도 지루한 순간이 없었다. 뛰어난 무대 구성과 연기자들의 열정, 그리고 드럼 연주를 비롯한 음악이 넓은 무대를 꽉 채웠다. 마지막 즈음 웰링턴이 체코로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았던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그녀를 인터뷰하게 된 이유를 밝힐 땐(어머니를 존경했으니까요. 늘 활기차고 남들을 위해 일하고 할아버지와 멋진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가 멋있었으니까요) 객석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감동과 억울함의 눈물이었다. 20세기 초반을 격정적으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생애가, 그토록 뛰어나고 원대한 이상을 가진 인물이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번번이 좌절되고 벽에 부딪히고 결국은 비극으로 끝맺음하는 생애가 안타까워서 흘리는 회한의 눈물이다. 하와이에서 현순·이마리아 두 노인의 회상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 뒤 열여덟 살의 앨리스가 한 번 더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극장을 나섰다. 그러나 마음이 뿌듯했다.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힘이 나는 편인데 이 연극을 보고 나니 정말 그랬다. 1월 13일 시작해서 21일 일요일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상연한다. 열연하는 여배우 쓰러지기 전에 빨리 가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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