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Mar 24. 2024

아주 조금만 보여줌으로써 서사를 완성하는 소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리

한동안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피드엔 클레어 키건의 책들로 난리가 났었다. 10여 년 전 나온 『맡겨진 소녀』나 비교적 최근작인 『이처럼 사소한 것들』 두 편에 대해 유명 평론가부터 셀럽, 일반 독자들까지 그의 소설을 읽고 감동했다는 글과 사진들로 넘쳐났다. 나는 어떤 작품이든 베스트셀러가 되면 오히려 흥미가 좀 떨어지는 편이라 이 책을 애써 외면하고 살았다. 너무 인기가 뜨거운 책은 뭔가 패션 상품처럼 느껴져서 당장 집어 들기 좀 민망해지는 것이다. 그러던 중 그제 대학로의 동양서림에 갔다가 ‘킬리언 머피가 제작과 주연을 맡아 영화를 제작 중이다’라는 글을 읽고는 더 이상 못 참고 이 책을 사고 말았다. 킬리언 머피가 영화로 만들고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유독 그 문장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책은 나의 예상을 약간 배반했다. 소설의 진행이 생각보다 침착했던 것이다. 우선 1985년 아일랜드의 수녀원 담장 너머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녀들에 대한 착취와 학대, 강제노역 이야기를 고발하기 전에 빌 펄롱이라는 사내의 생애 전반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내 생각엔 단편보다 조금 긴 짧은 소설에서 목재와 석탄을 파는 펄롱이 그대로 수녀원 뒤 건물로 들어가 소녀들을 구출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클레어 키건은 그렇게 하는 대신 펄롱이 빈주먹으로 태어나 미혼모였던 어머니와 함께 미시즈 윌슨과 일꾼 네드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던 이야기를 찬찬히 쌓아 올린다. 성인 된 뒤에도 거래처 사무실에서 일하던 아내를 만나 데이트하고 결혼 한 뒤 딸 다섯을 낳아 키우는 이야기를 시시콜콜 모두 지어낸 다음에야 크리스마스 사건 이야기를 꺼낸다.      


1985년 아일랜드의 겨울은 매섭게 추웠다.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강을 묘사하는 소설 첫머리부터 그게 느껴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왜 제목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일까를 다시 생각했다. 모든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는 반증 아닐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모든 훌륭한 작품들은 디테일에서 증명된다. 생각해 보면 이 소설 역시 그렇다. 그냥 수녀원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두드리는 것하고 펄롱이 추운 새벽에 일어나 선 채로 빵에 버터를 발라 먹고 나가 트럭을 운전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석탄과 장작을 배달하고 마주치는 사람들과 외상값 이야기를 나누는 것 등등을 일일이 다 묘사한 뒤에 수녀원 문을 두드리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다. 그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클레어 키건은 이 짧은 이야기 속에 펄롱과 어렸을 때 함께 살았던 네드가 그의 친아버지임을 암시하는 대화까지 끼워 넣음으로써 탄탄한 서사를 쌓아 올린다. 이것은 철학자 한병철이 『서사의 위기』에서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 나의 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라고 한 말과 일치한다.      

클레어 키건은 번역자 홍한별에게 자신의 글을 번역하는 데 필요한 조언들을 정성껏 이메일로 보냈는데 놀랍게도 그 분량이 대학 노트 한 권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첫 문장에 대해서는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 싶었다’는 구체적인 배경까지 설명해주고 있는데(‘옮긴이의 글’에 나온다) 나는 이보다도 소설가 존 맥가헌의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다”라는 구절이 가장 반가웠다.


좋은 소설의 조건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주인공의 캐릭터에 공감이 가고 명백한 사건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러티브는 한 길로만 달려가지 않고 곁가지까지 풍성해서 그게 진짜로 있었던 이야기처럼 느껴져야 한다. 마지막에 주인공의 성장이 보이면 더 좋다. 이 소설이 그렇다. 짧지만 긴 여운이 남았던 소설이었고 주인공은 예상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세상과 맞설 결심을 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소녀들이 당하는 장면을 최소화함으로써 독자들은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걸레질하는 소녀들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그들은 쌍욕을 하며 빠져 죽고 싶으니 강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지만 펄롱은 무시한다. 그리고 석탄 광에서 발견한 젖이 분 소녀와 단골 식당 주인 미시즈 케호의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충고 정도가 세탁소 정보의 전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독자들은 충분히 분개한다. 앞의 책에서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정보를 전달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내주지 않는 정보, 즉 빠져 있는 설명이 서사적 긴장을 고조시킨다’라고 했던 말과 너무나 잘 들어맞는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이 역대 부커상 후보작 중 가장 짧은 소설이었다는 얘기를 굳이 기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찬사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번역자는 소설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기를 권하고 있고 추천사를 쓴 은유 작가도 그렇게 했다고 고백한다. 나 역시 그렇게 했다. 이 칼럼을 쓰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정말 마음이 시켜서 그렇게 했다. 책을 다 읽자마자 다시 처음 페이지로 돌아가고 싶었던 작품이 그동안 뭐가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나의 경우는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이후 처음이었다. 책의 엔딩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던가. 완벽한 엔딩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처럼 나도 두 번 이상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 같다. 배경이 크리스마스인 것도 한몫했다. 거리에 캐럴이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는 따뜻함과 차가움이 교차하는 시기 아닌가. 펄롱은 소녀를 석탄 광에서 데리고 나오며 자기 맘대로 흘러가는 강물을 부러워한다. 맨발의 소녀에게 외투를 벗어 준 상태라 추위는 더 선뜩하게 느껴졌다. 그는 소녀와 함께 걸으며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느꼈다. 석탄 때가 끼어 꼬질꼬질한 맨발의 소녀를 데려가는 것을 보고 ‘세탁소 계집애’라는 멸칭을 내뱉는 동네 사람들을 보면 펄롱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고생길이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생각한다. 서로 돕고 살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수십 년을 평생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못했는데 이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떳떳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으니 된 것 아닌가, 라고. 아마 클레어 키건도 이 마지막 장면을 쓰고 난 뒤 펄롱이 걱정되면서도 그가 자랑스러워서 살짝 미소 지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별 영향력 없는 칼럼이긴 하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