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쉘터(Shelter)》리뷰
연극을 자주 보고 리뷰도 많이 쓰는 편이지만 볼 때마다 늘 만족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드는 연극을 봤을 땐 리뷰를 아예 안 쓴다. 그런데 어제는 연극을 보고 나오는 순간부터 '어서 가서 빨리 집에 가서 리뷰를 써야지'라는 마음이 들었다. 어제 본 연극은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상연 중인 극단 골목길의 《쉘터》다. 이 연극의 작·연출을 맡은 안소영은 골목길의 소속 배우다. 이전 작품에서도 보았지만 배우 안소영을 처음 제대로 인식한 것은 동해에 있는 시민회관에서 보았던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의 경숙이 역이다. 참 예쁘고 연기도 잘한다 싶었는데 이렇게 거친 내용의 극본을 쓰고 연출할 줄은 몰랐다. 기대를 전혀 안 하고 갔다가 막상 보고 나서 너무 뛰어난 극본과 연출력, 그리고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에 놀란 것이다. 가히 '새로운 크리에이터의 발견'이라 할 만했다.
요즘 강아지나 고양이를 잃어버렸을 때 당근에서 찾는 게 제일 빠르다고 하던데 이젠 같이 자살할 사람도 당근으로 모집을 한다. 《쉘터》는 당근을 통해 동반 자살을 하고자 모인 네 명의 청소년 이야기다. 십 대 연령이다 보니 말끝마다 존나, 씨X 등 욕설이 난무하지만 그게 이상하진 않을뿐더러 오히려 극의 흐름을 제대로 잡아주는 느낌이다(서로 나이 물어볼 때 윤 나이'라고 부연설명 하는 것도 재밌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면서 나이 계산법이 바뀌었으니). 배달 아르바이트, 조건 만남, 또래 포주 등으로 어렵게 살아가던 최하층 청소년들은 각자 자살을 할 이유가 충분하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살 방법 등을 논의한다. 심각하고 비참한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유머까지 섞어 형상화하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박근형 작가가 쓰고 연출한 《너무 놀라지 마라》도 생각났다(나는 극본집으로 읽었다). 주연을 맡은 김재민, 홍명환 콤비의 연기가 좋았고 은별 역의 김지우, 가희 역의 정단비도 캐릭터를 잘 살린 극이었다. 극단 동료인 안소영의 이 작품에 기꺼이 출연해 좋은 연기를 보여준 김혁민, 이현직, 최유리 배우들도 멋졌다. 내가 지난달 한국일보 칼럼에 썼던 연극영화과 학생 김무정도 이 연극을 봤다고 하길래 인스타그램 메신저로 물어보니 은별 역 배우가 친구이고 정수 역이 일 년 선배라고 한다.
연극은 청소년들이 겪는 사회적, 경제적 압박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특히 밀린 월세를 내기 위해 자살 모임의 회비를 사용하는 장면은 현실의 아이러니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안소영 작가는 이 공연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동시에,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연대감과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무겁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해답을 내리지 않는 점도 믿음직스럽다. 좋은 연극이나 영화, 책일수록 빠른 해답 대신 좋은 질문을 던지는데 이 작품 역시 그렇다. 연극을 보고 나와 극장 입구 계단에 서 있던 안소영 작가를 만나 "아니, 예쁘게 생겨 가지고 이렇게 쎈 연극을 만들다니!"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내가 기괴한 상황에서 시치미 뚝 떼고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박근형 작가의 《너무 놀라지 마라》를 떠올렸다고 했더니 자신은 이제 겨우 두 번째 작품을 했을 뿐이라면서 겸손해했다. 3월 31일까지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상연한다. 극본, 연출, 연기 모두 좋으니 어서 가서 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