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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l 25. 2019

할머니의 오지랖

체육관에서 생긴 일

동숭동에 있는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에서 수영 강습을 받으려면 반드시 한 달에 한 번씩 지정된 날짜에 와서 등록을 해야 하는데 우선권을 갖는 종로구민과 기존 회원이 25일 아침이고 다른 구민들과 신규 회원은 26일 아침이다.

나는 지난달부터 다니기 시작한 기존 회원이라 25일인 오늘 아침에 왔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오 분쯤 체육관을 향해 걷다가 회원권을 안 가져온 것이 생각나 혹시나 하고 다시 집으로 가서 회원권을 가지고 나왔더니 여섯 시 반이 되었다. 그새 사람들이 많아 나는 대기번호 80번이었다. 어쩌다 새벽에 일어나 일 보러 나올 때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며 뭔가 반성하는 마음이 된다. 번호표를 뽑아놓고 접수 시작인 일곱 시가 되길 기다리며 로비에서 할머니들 틈에 앉아  KBS 뉴스를 보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번호표 뭉치를 들고 나타나셨다.

"아니, 번호표를 왜 이렇게 많이 뽑았어?"
"다른 사람 주려고 뽑았지."
"나는 있어."
"나도 있어."
"그럼 다른 사람 줘야지. 잠깐 있어. 나 이거 다른 할멈 주고 올게."

할머니는 번호표들을 들고 다른 할머니에게 가서 인사를 하며 "진이 할매 내일 수술이라며?"라며 서로 안부를 물었다. 오지랖이다. 미리 와서 시키지도 않은 암표 공급을 하는 할머니는 분명 오지랖 대마왕이다. 그런데 밉지가 않다. 그러면 좀 어떤가. 새로운 할머니에게 간 표는 같은 동네 할머니들끼리 빨리 등록을 하고 같이 돌아가게 해 줄 것이고 그렇지 못한 표는 자연스럽게 사표가 될 것인데.

로비는 금새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졌고 대기번호는 어느덧 50번을 넘어섰다. 이분들은 수영만 하러 다니지는 않는 것 같다. 아침부터 만나 서로 안부를 전하고 웃음을 주고받는 게 목적이고 수영은 덤인 게 분명하다. 어떤 할머니가 오더니 소파에 앉아 있는 오지랖 할머니에게 인사를 한다. "형님 덕분에 빨리 끝났어. 고맙습니다아~" 할머니가 웃었다. 나도 할머니의 오지랖이 한 건 했구나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새 할머니가 오셨다. 내가 앉은 소파에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는 바람에 옆으로 밀린 나는 한쪽 엉덩이만 겨우 걸친 채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자꾸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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