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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l 10. 2024

쓰는 기쁨에 살았던 여자들 이야기

고은규의 『쓰는 여자, 작희』(교유서가)

왼손으로 글을 쓰는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의 직업은 쇼콜라티에인데 너무 열심히 초콜릿을 만드는 바람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안쪽으로 살짝 굽은 채 굳어버린 것이다. 정형외과에 가서 손가락에 염증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고 며칠 후 손가락이 예전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자유롭게 글씨를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날부터 왼손으로 그림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안 하던 사람이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루라도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출 시엔 어딘가에 백만 원을 기부하겠다고 SNS에 공언까지 했고 그런 사연으로 시작된 왼손 글씨 일기를 매일 지켜보던 한 출판사가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카카오봄 대표 고영주의 『이만하면 달콤한 인생입니다』(보다북스)다.


왜 이 얘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 오늘 소개할 『쓰는 여자, 작희』의 주인공 이작희도 왼손으로 쓴 글을 남긴 여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왼손잡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녀 역시 글을 쓰다가 손을 다쳐 할 수 없이 왼손으로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그 행위가 결국 한 때 애인이었던 남자에게 자신의 작품을 빼앗겼으면서도 원작자임을 증명할 수 없는 플롯으로 작용한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릴 정도로 유명한 오영락 작가의 소설 『미쿠니 아파트』의 원작가가 이작희라는 것을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알고 독자들도 알게 되지만 그녀가 남긴 이 ‘왼손 글씨’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다. 소설가 고은규가 사소한 에피소드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은규의 『쓰는 여자, 작희』는 극작가 경은, 시나리오 작가 윤희 등과 작업실을 운영하는 주인공 은섬이 ‘작가들 옆에 붙어서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잡귀’들을 쫓아내기 위해 왔다는 퇴마사 ‘미스터’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글 쓰는 여자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인데 퇴마사부터 등장시키다니, 의외의 시작이다. 작가는 퇴마사를 등장시킴으로써 이 이야기가 명백한 픽션임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야기에 들어 있는 ‘쓰는 사람들’의 열망만큼은 진중하고도 간절하다.


이는 소설 제목에도 들어 있는 ‘작희’라는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다. 분명 5,000자를 써서 저장했는데 999자만 남아 있다는 윤희의 말에 퇴마사 미스터는 그게 작희의 소행이라 말하고 은섬은 이름을 못 알아들어 “자키......요?”라고 되묻는다. 고은규는 왜 주인공 이름을 작희라고 정했을까. 지을 작(作) 자가 작가를 뜻한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문제는 희 자다. '쌍희 희(囍)'는 ‘혼인이나 경사가 있을 때의 그 기쁨을 뜻한다’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기쁠 희喜喜) 두 개가 합쳐진 회의자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희의 엄마인 중숙은 딸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이야기를 지으며 기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소설 안에서 밝히고 있다. 집안의 노비 문서를 없애고 아내를 위할 줄 아는 양반 시아버지 충길은 마음에 들지만 바람둥이에 속도 좁은 그의 아들 홍규가 싫어 결혼 전 이틀이나 가출을 감행했던 중숙이다. 그녀는 옛소설처럼 선악이 분명하고 순차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걸 좋아한다. 그렇다. 이야기는 액자형식을 빌어 단숨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삶의 의미와 재미를 찾던 여성들에게 가 닿는다.  

   

퇴마사가 나오고 타임슬립이 이루어지니 이건 SF나 판타지 소설인가.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런 건 작가가 글쓰기에 대한 소재나 인물들을 보다 자연스럽게 펼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중숙과 작희의 이야기가 나오다가 중간에 은섬과 미스터의 이야기를 삽입해 흐름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중숙이나 작희가 글을 쓸 때는 ’And’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옷을 입은, 머리 짧고 동그란 안경을 쓴 외국 여자가 나타나 ‘등장인물이 너무 많으니 좀 빼라’라고 조언을 하기도 한다.


이런 장치들에 재치에 비해 고은규의 문장은 담담하고 서늘해서 이물감 없이 매끄럽게 읽힌다. 그렇다고 시퀀스만 나열하는 것도 아니다. 쓸데없이 흥분하거나 멋을 부리지 않아 스토리에만 복무하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꾸미고 주요 인물의 성정을 만들어 가는 방식이 긍정적이고 힘차다. 무엇보다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는 소설이다. 근래에 읽은 책 중 가장 빠르게 물 흐르듯 읽혔다.

     

소설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소설을 쓰고 나면 그걸 읽어 줄 독자가 있어야 하고 그걸 비평해 줄 문단이나 평론가도 필요하다. 그래야 흥이 나서 계속 쓸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중숙은 매일 한두 시간씩 시간을 내 무조건 쓰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다. 그만큼 여성이 글을 쓰는 게 힘들었던 시대였다. 그녀는 관철청에서 서포를 운영하며 글을 쓰고 딸에게도 문학의 즐거움을 알려준다. 이에 작희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글을 쓰고 싶어요.”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하고 어머니가 쓴 글을 읽고는 ‘요즘 소설들은 사건을 시간순대로 쓰지 않는다’면서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를 쓰면 좀 더 긴장감을 줘서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다는 충고도 해준다.  


엄마의 소개로 만나게 된 소설가 오영락과 그 친구들이 만든 문학회 ‘사소인(네 명의 소인배들이라는 뜻이다)’에 가서 “글이 안 써질 때도 억지로 써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 작희의 모습에서는 고은규의 창작론을 엿볼 수 있다. 질문을 받은 문인 나한구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고 인물의 세세한 이력이 정리된 상태라면 설사 안 써지더라고 계속 앉아서 쓰는 게 맞고, 주인공의 생김새나 말투가 아직 모호하고 주변 인물들도 제대로 생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글을 쥐어짜는 건 쓰는 자도 읽는 자도 힘들기만 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라고 일갈한다. 현대의 국문과나 문창과 강의실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소설엔 중숙, 작희, 은섬, 영락 같은 인물 말고도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홀연히 나타나 작희를 돕던 기자 손계연도 멋지지만 그보다 아버지의 노름빚에 팔려와 흥규의 첩으로 살던 미설이 결국 작희와 마음으로 연대하는 장면은 숙연하고도 뿌듯하다. 눈 밝은 독자들이 많아서 나오자마자 금세 중쇄를 찍었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제목만 알고 있다면 얼른 책을 구해 읽어보시길 바란다.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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