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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18. 2024

따뜻한 수다와 눈물이 만들어 내는 감동

연극 《은의 혀》

 

'돌봄'을 다룬 이야기이고 관객들이 많이 운다는 소문을 들어서 연극이 좀 어둡고 심각할 거라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처음 자예식장 303호에서 은수와 정은이 마주칠 때도(은수 역의 강혜련 배우는 여덟 살짜리 아들의 장례를 치른 303호에 계속 문상객으로 찾아온다) 상조도우미 정은 역을 맡은 이지현 배우의 만만치 않은 입담 때문에 웃으면서 시작할 수 있었고 이어지는 학교 급식실이나 병원 시퀀스에서도 정다연 이후징 이경민 배우의 타이밍이 딱딱 맞는 춤과 노래 등 멀티 연기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었고 기타리스트 김정민과 함께 펼치는 대사와 음악의 어우러짐은 연극만이 줄 수 있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빠른 장면 전환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박지선 작 윤혜숙 연출의 《은의 혀》는 정은과 은수 두 사람의 이름에 다 들어 있는 '은'이라는 공통점과 함께 상조도우미 정은이 "우리 집안은 외증조할머니 때부터 혀가 은색이었어. 독이 든 음식에 혀를 대면 까맣게 변하지. 그래서 내가 늘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거야. 내 혀 보면 사람들 놀랄까 봐' 같은 구라 덕분에 붙은 제목이다.


아들이 죽은 병원 장례식장에 와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조를 하고 빈 속에 소주를 마시는 은수도 불쌍하지만 가족도 없이 영안실 도우미로 일하다가 후배 월선이가 꼬시는 바람에(아르바이트하던 고깃집 불판을 던져버리고 나온 여성이다)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다 폐암에 걸린 정은도 안 풀리는 인생이다.

그런데 이런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생겨나니, 바로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능력이다. 정은의 마음씀에 감동한 은수가 정은을 돕게 되고 후배인 월선과도 친구가 된다.. 극본을 쓴 박지선 작가는 이외에도 재범 준철 트란 같은 주변 인물들에게도 골고루 온정의 시선을 보낸다.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다. 나중에 읽은 제작노트에서 '정은의 은빛 구라는 누군가 버리고 간 전집을 주워 골방에서 읽고 또 읽은 덕에 생긴 능력일 것'이라는 작가의 설명이 나오는데 참으로 쓸쓸하고도 따뜻한 캐릭터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연극은 너무 좋았는데 어제 열흘 만에 서울에 온 기념으로 아내와 성북동 실내포차 '본점'과 호프집 '꼬꼬댁꼬꼬'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아침에 칼럼 원고 때문에 일찍 일어나 움직였더니 갑자기 졸음이 밀려와서 좀 힘들었다. 그래도 너무 좋은 기분으로 두 시간 연극을 다 보고 극장 문을 나섰다. 신호등 앞에서 연극 좋았다고 얘기를 하는데 마침 이지현 배우가 서 계시길래 연극 잘 봤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더니 고맙다고 인사를 받고 가다가 다시 돌아와 "저, 혹시 편성준 작가님 아니세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어떻게 아시냐고 물었더니 나의 팬이라 인스타 팔로잉도 하고 있고 내 책도 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바보 같이 저도 팬이에요, 라고 인사를 했다. 실제로 나는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물론 《잘못된 성장의 사례》 《20세기 블루스》에 나온 이지현 배우의 연기를 너무 좋아했고 《테디 대디 런》에 잠깐 출연했을 때도 좋았다. 내가 하도 싱글벙글하니까 아내가 옆에서 "당신, 좋겠다."라며 놀리며 부러워했다. 당장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이지현'을 검색해 보니 다들 비공개 계정이었다.  가장 배우 이지현일 것 같은 사람을 골라 일단 팔로잉을 눌렀다.

이지현 배우가 나오는 좋은 연극이니 꼭 보시기 바란다. 2023년 국립극단의 [창작공감: 작가]를 통해 개발되었던 작품이고 , 연습을 거쳐 2024년 8병원과 학교 급식소 현장 리서치와 세미나 연습을 거쳐 2024년 8월 15일부터 9월 8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한다.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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