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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2. 2024

평범한 문체로 쓰인 비범한 이야기

김애란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엄마와 아빠, 그리고 딸 세 사람이 거실에서 수박을 쪼개 놓고 TV로 야구중계를 보고 있다. 셋 다 집에서 입는 후줄근한 옷차림이다. 엄마는 평소 가벼운 모서리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아빠를 자주 놀렸는데 그날도 일부러 수박 끝을 겨누며 가짜 위협을 했고 이에 아빠는 햇볕에 노출된 흡혈귀마냥 수박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맞장구를 쳤다. 거실에서는 선풍기가 탈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밖에선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안타가 터져 응원하는 팀이 점수를 내자 아빠가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다가 자긍심에 찬 얼굴로 한 마디 한다. "야구에, 수박에. 진정한 여름방학이다." 딸이 그 장면을 휴대폰에 담았더니 엄마가 이런 걸 왜 찍냐고 불평을 한다. "나 오늘 머리도 안 감았단 말야."


김애란의 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서 여고생 김소리가 회상하는 행복했던 시절의 묘사다. 나는 이 장면을 읽고 김애란 작가가 글도 참 쉽고 자연스럽게 쓰지만 희로애락의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솜씨가 그야말로 장인급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건 이전 단편 소설에서 인공지능 시리(Siri)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씁쓸하게 묻거나 택시 기사 용대가 이미 쓸모가 없어진(중국 출신 아내가 죽었다) 중국어 회회 테이프로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연습하는 장면에서 느낀 감정과도 비슷하다. 이번 소설에서는 운동하느라 공부가 처진 채운이 '바람영어 앱'에게 자신의 진실을 영작문으로 고백하는 아이디어가 그렇다. 인간사의 쓸쓸함과 허무, 그러면서도 남아 있는 한 가닥의 미련까지 탁월하게 문장으로 그려내는 작가가 바로 김애란이다.


김애란의 신작 장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담임 선생님이 전학생에게 자기소개를 할 때 다섯 개의 문장을 말하는데 그중 하나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게임 아이디어에서 나온 제목이다. 축구를 하다가 부상을 당하고 전학을 온 오채운은 규칙대로 하나의 거짓말을 섞어가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이것 만으로는 그의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있고 엄마는 감방에 갔다는 사실을 친구들은 알 수 없다. 그의 엄마는 왜 감옥에 있는가.


도마뱀(레드 아이 아머드 스킨크)을 키우며 올린 카툰 일기 덕분에 유명해진 지우의 또 다른 연재 카툰 '내가 본 것' 때문에 두 소년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긴다. 그리고 역시 같은 반 소녀인 소리의 어떤 '능력' 덕분에 세 사람의 사연이 하나로 묶인다. 이 소설은 가난과 죽음, 폭력, 살인이 등장하지만 전형적인 악당은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악당 역을 맡아야 할 트럭운전사이자 지우 엄마의 동거남인 선호 아저씨마저 약한 구석이 있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악당은 누구인가. 수업 시간에 지우가 쓴 짧은 시에 힌트가 있다.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나는 이 글을 읽고 이성복의 '남해금산'에 있는 시 구절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이란 대목을 떠올렸다. 그렇다. 우리 곁에 있는 가난과 갈등처럼 삶을 할퀴는 운명이 바로 악당이다. 그래도 김애란은 '작가의 말'에서 삶은 가차없고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입힐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 마지막에 좋은 이야기를 남기고,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 머물다 떠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긴다. 이는 선호 아저씨가 파출소에서 채운을 데려올 때 트럭 안에서 하던 '이중 하나는 거짓말' 게임에서 거짓말이 하나 없었던 것을 믿는 것처럼 독자를 향한 작가의 갸륵한 마음에도 한 치의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 사는 게 힘들수록 우리를 견디게 하는 것은 결국 연대와 착한 마음이라는 것을 김애란은 13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로 가르쳐 주고 있다. 평범한 문체로 이토록 비범한 이야기를 쓰다니. 내가 책을 다 읽고 느낀 한 줄 소감이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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