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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6. 2024

그림과 소설이 모두 예술임을 증명하는  소설

김탁환의 『참 좋았더라』


'담뱃갑 안에 들어 있던 은종이 위에 송곳으로 그린 그림 한 장이 수 천만 원 넘게 팔리는 화가가 있다더라'

어렸을 때 들은 이중섭에 대한 신화는 이런 식이었다. 그림 한 점 제대로 팔지 못하다가 사후에나 예술성을 인정받았던 빈센트 반 고흐처럼 한국엔 이중섭이라는 화가가 불운의 천재 역할을 떠맡았다. 교과서에서 본 그의 소 그림은 언제 봐도 힘이 넘치면서도 슬프다. 그런데 그 소가 언제 어떻게 그려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물장구치며 노는 그림은 이중섭이 제주에 머물렀을 때 그린 행복한 기억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군산북페어에서 김탁환 작가와 남해의봄날 정은영 대표를 만나고 전국의 독자들 중 가장 먼저 손에 넣은 그의 32번째 장편소설 『참 좋았더라』를 읽는 내내 소설이라는 장르의 힘과 자유로움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틀 동안 연필로 줄을 쳐가며 빠져들어 읽었다.  


이 소설은 이중섭이 고향인 원산을 떠나 제주, 부산, 마산, 진해를 떠돌다가 한때 머물렀던 통영에서의 '화양연화'를 그리고 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도쿄에 남겨두고 온 이중섭은 원하는 '대작'을 그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마영일이라는 악당에게 사기를 당해 30만 엔이라는 큰 빚까지 진 처절한 상황이었다. '웃어도 두 눈엔 슬픔이 가득했던(시인 김춘수의 표현)' 이중섭을 통영의 친구들은 따뜻하게 감싸고 보듬었다. 소설의 제목 '참 좋았더라'는 이처럼 통영에서 그에게 작업실을 내주고, 물감과 종이를 사주며 환대했던 유강렬 유택열 김용주 전혁림 유치환 김춘수 구상 김환기 같은 후원자 겸 친구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정해졌으리라.

하지만 통영에서 이중섭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사람은 남대일이라는 소년이 아니었을까 한다. 유강렬이 연 나전칠기양성원에도 가장 눈썰미 좋고 몸이 날렵해 다람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대일은 스승 이중섭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그를 돕고 틈 날 때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시와 그림과 예술 이야기를 빨아들인다. 그림 못지 않게 시를 사랑했던 이중섭은  랭보나 프란시스 잠, 폴 발레리 같은 시인들의 시를 줄줄 외우는 문화인이요 서양 미술사를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또 흠모했던 모더니스트였다. 통영의 예술가들과 '로댕의 비서로 일하며 릴케가 배웠던 것' 등에 대해 주고받는 대화들은 그들의 예술적 품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산에서 이름난 백화점 사장을 친형으로 두어 돈 걱정이 없었던 이중섭은 전쟁만 나지 않았다면 파리로 가서 그 예술가들의 흔적을 직접 더듬었을 텐데, 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현실은 원산에 두고 온 어머니도, 도쿄에 남기고 온 가족들도 만나지 못하고 통영의 작업실과 다방, 술집만 오가는 처지다. 그림을 그리기 전 여기저기를 마구 싸돌아다니는 이중섭의 버릇 덕분에 대일이 스승을 찾아온 통영 바닥을 헤매고 다니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는 소설가 김탁환이 대일이를 통해 통영의 지리를 아주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통영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는 안뒷산 얘기가 나올 때는 몇 년 전 통영 출신 에디터 박효성 씨와 함께 올랐던 기억에 더 반가웠고.


화이트 물감이 더 필요한데 미안한 마음에 대일을 페인트 가게로 보낸 이중섭을 보고 김용주는 '열망이 크면서도 염치를 아는 인간'이라고 그를 평한다. 그림 이외엔 할 줄 아는 게 없고 마음도 여렸던 이중섭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예술가들이 모여 밤낮 술 마시며 얘기한다고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는 당연한 대목에서는 뜨끔해질 정도다. 이 소설은 그런 예술가의 일생 중 가장 마음 편하면서도 치열하게 그리던 시절의 이야기이며 소설가 김탁환은 그의 대표작인 소 그림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직접 본 것처럼 그리고 있다. 아, 할 얘기가 많지만 다른 건 다 빼고 대일이 아버지의 사물함에서 뒤늦게 발견된 은지화 에피소드만 이야기하고 끝내야겠다. 소설 시작에 등장하는 갑판장과의 대화가 소설 말미에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백미다. 김탁환은 이중섭의 생애 중 6개월이라는 짧았던 통영에서의 화양연화를 통해 자신의 예술론까지 돌아보면서도 이런 짜릿한 소설적 장치를 고안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바로 전에 나왔던  『사랑과 혁명』 때문에 출판사가 몇 년을 기다려준 소설이다. 아직 뜨끈뜨끈한 이 소설을 얼른 펼치시기 바란다. 그림과 소설이 모두 예술임을 증명하는 장편소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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