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산수유의 《고트( GOTT)》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 서두에서 왜 하필 자살 문제를 언급했을까. 아마도 죽으면 철학자들이 얘기한 그 모든 복잡한 현상과 고민도 다 소용 없어진다는 가장 단순한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민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인간은 불합리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지만, 결국 부조리에 부딪히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카뮈의 실존주의적 고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할지, 아니면 그 무의미함에 굴복해 버릴 지에 대한 선택과 대결에 관한 얘기다. 물론 알베르 카뮈는 이런 부조리 속에서도 저항하고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강조하지만.
그런데 어제 이런 고민에 다시 불을 붙이는 논쟁적인 연극을 만났다. 독일 작가 페르디난트 폰 시라흐의 《고트( GOTT)》다. 극단 산수유가 제작해 국내 최초로 공연하는 이 연극은 3년 전 부인과 사별한 76세의 게르트너가 의사에게 자신의 죽음을 도와 달라고 청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불치의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정신도 멀쩡한 노인이 단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죽음을 원하는데 거기에 얼씨구나, 하고 의사가 독약을 처방하는 게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문제 때문에 급기야 공청회가 열리는 것이다.
윤리위원회가 주최한 이 공청회에는 의사, 변호사, 법학자, 의학자, 종교인 등의 전문가들이 나와 이 사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다. 갑자기 이 대목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이건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에서 출발하기에 아무리 다투어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헛짓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이 공청회를 굳이 해야 할까? 그러다 얼마 전 최채천 교수가 쓴 『숙론(熟論)』을 읽고 깨달았던 것들이 다시 생각났다. 나는 그동안 토론이라는 건 상대방을 이겨야만 끝나는 거라고 착각하지 않았나.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사실과 깨달음이 진짜 소중한 통찰인 것을.
다행히 이 연극의 배경은 한국이 아니라 독일이다. 내가 다행이라고 하는 이유는 독일이기에 더 치열하게 즐길 수 있는 사상의 두께와 반성의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법학자는 개인이 원하는 대로 죽음을 처방하다 보면 나치가 했던 것처럼 인간을 분류하게 될 것이고 결국 죽음을 사고파는 자본주의가 성행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고 대주교는 성경에서 자살을 허락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삶을 비롯한 모든 만물은 신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역설한다(이 연극의 제목이 독일어로 신이다). 이에 게르트너 측 여성변호사는 유들유들하개 농담을 섞어가며 그 주장에 대한 반론을 조목조목 내놓는 것은 물론 심지어 성경에 들어 있는 모순들까지 가차 없이 들춰낸다. 이 과정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수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등장하고 멀리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자유롭게 송환된다.
그렇다. 싸움을 하려면 말솜씨, 순발력뿐 아니라 이 정도로 논리와 팩트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슨 소리냐,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논의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거냐, 라고 물으신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꼬리를 내리겠다. 하지만 지금 정치권이 하는 행태나 TV토론 프로그램을 한 번이라도 보면 그런 말이 나오냐, 라고 반문하고 싶기도 하다. 말이 옆으로 샜다. 죄송하다.
어제가 국내 초연이었는데 배우들의 연기가 조금 느슨했다. 대사도 아직 입에 붙지 않은 것 같았고 파워도 약했다. 류주연 연출의 이전 《숲》이나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엄청 휘몰아치는 밀도와 속도감을 자랑할 것 같은데 어제는 오히려 열린 무대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조금 널널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모였으니 2회부터는 더 쫀쫀해질 것이다.
연극은 열띤 논쟁을 지나 QR코드를 이용한 찬반투표까지 이어지는 흥미로운 진행이다. 물론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극단은 어떤 게 찬성이고 반대인지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내 생각과 같아 통쾌했다. 2024. 9월 6일 시작해서 9월 1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상연한다. 전석매진이라는 소식이 들리지만 어떡하든 표를 구하면 한두 장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추천한다.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