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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9. 2024

친절하지 않음의 미덕

극단 골목길 《구름을 타고 가는 소녀들》

 


구름 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비와 천둥, 가벼움, 어린 시절의 꿈...박근형 작가가 이끄는 극단 골목길의 신작 제목이 '구름을 타고 가는 소녀들'이라서 떠올려 본 생각이다. 그동안 올렸던 작품들에 비해 제목이  참 예쁘다는 생각은 극이 시작되는 순간 박살 난다. 멸망 직전의 세계, 이상한 공동체, 쌍욕과 손찌검을 시전하는 여자들, 감금과 고문, 채찍, 비명..하하. 그러면 그렇지. 이건 박근형 연극인데.


무대의 불이 켜지면 번개 역을 맡은 장영남 배우의 독백으로 극이 시작된다. 《요셉이 돌아왔다》의 윤제문 배우처럼 장영남 배우도 매체에서 활동하는 골목길 출신인데 오랜만에 연극무대에 섰다. 강가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부모를 잃고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강 건너로 넘어온 번개는 자신이 왜 여기와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지배하는 버들이라는 여성 대장은 자신이 예전에 잘 알던 그 사람 아닌가. 죽지 않고 살아 만난 기쁨에 서로 얼싸안는 두 여성. 그러나 반가워하기엔 환경이나 시기가 너무 좋지 않다.


먼저 와 있는 맹추라는 소녀는 살기 위해 자신의 젖먹이 아이를 강에 버린 경력이 있는데 굳이 그걸 들춰내는 휘뚜루마뚜루와 쌍욕을 하며 육탄전을 벌인다. 서로 머리카락을 끌어당기고 렌턴과 걸상을 집어던지며 살벌하게 싸우던 두 사람은 마을에서 잡아온 젊은 남자애들을 묶고 때리고 주사기로 피를 뽑을 때는 또 뜻이 맞아 희희낙락 거린다. 이들이 싸울 때 나타난 의사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맨 채 영어를 중얼거리는 지식인 남성은 버들이의 남편이다. 버들은 번개에게 남편이 '여덟 살 연하'라며 자랑을 한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도 정상은 아니다.


이호열 안소영 홍명환처럼 눈에 익은 골목길 배우들과 권지숙 장영남 박소연처럼 다른 작품에서 자주 만나던 배우들이 호흡을 맞춰 열연을 벌인다. 음악은 장엄한 레퀴엠부터 '화양연화 OST'에 이르기까지 다소 노골적으로 장면과 잘 붙는다. 중간에 영어 개그를 살짝 하는 이호열 배우의 연기는 진지해서 더 코믹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극이 친절해지는 건 아니다. 이번 작품도 시작부터 디스토피아가 완연하고 등장인물들은 사납거나 비관적이다. 권지숙이 맡은 버들이가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이상은 무엇인지, 동네 청년들은 왜 벌거벗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여길 떠나지 않는지, 맹추는 의사가운을 입은 지식인을 정말 사랑하게 된 건지, 막내 예쁜이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다.


마지막 공연날이었기에 배우와 스태프들이 회포를 푸는 삼겹살 회식에 우리도 합류해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극단 대표를 맡고 있는 이호열 배우와 박소연 배우, 안소영 배우 등이 기꺼이 아내와 나를 초대해 준 덕분이다. 개인적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박근형 대표를 제외한 프로젝트 인원 모두가 술잔을 높이 들며 그동안의 노고를 서로 치하하고 격려했다. 이번엔 조연출을 맡은 최유리 배우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아내가 이호열 배우는 점점 잘생겨지는 것 같다고 했더니 자신은 십여 년 전부터 꽃미남이었다고 대답해 좌중을 웃겼다. 장영남 배우는 내가 오래전부터 팬이었다는 아내의 얘기를 듣고 같이 반갑게 대화를 한 후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진은 박소연 배우가 찍어 주었다.


이호열 배우는 '다들 쉬운 연극만 찾는 대학로에서 이런 연극을 계속 만들 수 있는 게 박근형 연출의 힘'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어느 한순간도 뻔하지 않게 흘러가는 기대감 때문에 우리는 박근형의 연극을 보게 된다. 이번 연극 또한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를 묻고 있지만 쉽게 답은 나오지 않는다. 희망이나 유토피아는 존재하는가. 그냥 갈 순 없어서 '구름을 타고' 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비관주의가 주는 의외의 쾌감이 있다. 박근형은 그걸 귀신처럼 잡아 동시대 관객들에게 전하고 또 질문한다. 표면 뒤에 숨어있는 본질을 꿰뚫어보거나 눈치라도 챌 때 세계를 보는 눈은 확장된다. 우리가 친절하지 않은 예술을 가끔, 또는 자주 접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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