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Oct 05. 2024

술과 요리, 사람에 반했던 야소주반 북토크

통영 야소주반 :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북토크

통영의 '야소주반'이라는 예약제 식당에서의 북토크는 책이 나오자마자 바로 얘기가 나왔는데 2024년 6월 18일 진주문고 북토크 때 김은하·박준우 커플이 친히 참석하시는 바람에 급물살을 타 10월 4일로 정해졌다. 마침 개천절 연휴라 아내와 나, 그리고 아내가 기획 스터디 모임에서 만난 강종희 선생 이렇게 셋이 하루 전에 고속버스를 타고 통영으로 왔다. 아직 KTX도 비행기도 직행이 없어서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이라 불리기도 하는 통영에서의 하루는 야소주반 주인장 두 분의 환대로 시작되었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간 서호시장에서 싱싱한 해산물과 더불어 박준우 건축가가 빚은 술을 언더락으로 대낮부터 마시는 행운을 누렸다. 술이 맑고 안주가 좋아서 그런지 취하지도 않았다. 술이 약한 강종희 선생도 과음(?)을 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박준우 건축가는 낮술은 사실 아침 일찍 시작해서 오후 한 시 전에 끝내는 게 진짜 묘미라며 웃었다. 그래야 오후를 건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야소주반이 있는 야솟골은  대장간이 있던 마을이라 그렇게 불렸는데 여기에 밥과 술을 더해 '야소주반' 이 된 것이다. 김은하 대표의 설명에 의하면 처음에 인당 3만 원, 5만 원 코스로 시작했다가 리뉴얼을 거쳐 이제는 인당 12만 원 코스를 파는 식당이 되었다. 박준우 건축가는 2011년도에 서울특별시 건축상을 탄 뒤 중국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관심 있던 차와 국수에 대해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중국의 백 가지가 넘는 국수 얘기를 할 때는 너무 신나 보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최고의 국수는 김은하 대표가 집에서 해주는 고기국수라고 해서 우리의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차를 마신 뒤 좀 쉬다가 저녁 겸 건축가가 빚은 과하주와 증류주를 곁들인 멋진 저녁상을 받았다. 김은하표 고기국수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국물부터 면까지 기대 이상이었다. 고성의 앉은뱅이밀로 만든 면발은 탱글탱글했고 고기라기보다는 '젤라틴에 가까운 돼지수육'은 환상적이었다. 국수를 좋아해 국수 이야기로 책까지 썼던 강종희 선생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과식을 했음은 물론이다. 김은하 대표는 저녁에 자신의 집 다이닝룸이 아닌 주방에서 밥이나 술을 함께 먹는다는 건 그만큼 친해졌다는 뜻이라며 우리의 음주 의지를 북돋았다. 박준우 건축가가 먼저 일어나 침실로 간 뒤에도 세 사람은 앉아서 웃음꽃을 피우며 수다를 떨었다(박준우 대표와 연애 시절 얘기 많이 한 건 안 비밀).


다음날 아침은 전날 주차장에 세워두고 온 자동차도 찾을 겸 다시 서호시장 '년우식당'에 갔다. 첫날 시장에서 떠 온 회를 들고 가 먹었던 집으로 다시 가서 백반으로 해장을 하는 것이었다. 다른 반찬들도 좋았지만 특히 콩나물국이 시원해 강종희 선생과 나는 두 그릇이나 먹었다. 바로 식재료를 산 뒤 야소주반으로 돌아왔다. 김은하 대표가 빠르고 예술적인 솜씨로 요리를 해낸다면 박준우 건축가는 장보기와 행사 세팅·진행, 그리고 술에 대한 모든 것을 맡아하는 시스템이었다. 12명 모집이었으나 신청자가 늘어 김은하 대표의 친동생인 김나영 선생까지 총 17명의 참가자들이 야소주반으로 모여들었다. 섬 여행을 몇 년째 같이 다니다가 올해 처음 통영에 오신 남성 세 분이 계셨고 부산, 대전, 진주, 서울 등 다양한 곳에서 온 커플들이 많았다. 전주에서 온 이채선 선생처럼 친하게 지내는 지인도 있었다. 오후 5시 정각에 강연이 시작되었고 나는 인사를 하자마자 혹시 지금 배가 고픈 분이 계시냐고 물었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강연자가 떠드는 걸 듣고 있자면 강의에 집중도 못하고 자꾸 음식에 신경이 쓰이니 지금 말씀하시라고. 모두 괜찮다고 했다.


이번 북토크는 『읽는 기쁨』뿐 아니라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와『부부가 둘 다 잘 먹었습니다』까지 다루는 행사라 전체 주제를 '보다 나은 삶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잡았다. 나는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퇴사 이후 책을 쓰고 작가 생활을 하며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잡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작가가 아니라도 글을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다. '말은 두서없이 나오는 생각이고 글은 잘 정리된 생각'이라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지 말고 장면을 보여줘야 한다(Show. Don't tell)' 김종삼이나 헤밍웨이를 예로 들기도 했고 내가 일상에서 건진 글들이 나중에 책에 어떻게 실렸는지도 보여 주었다. 지금 당장 글을 쓸 필요는 없지만 새로운 생각만이 다른 삶을 만들어 준다며 '공처가의 캘리'와 결혼식 기념일 아침마다 일어나자마자 찍는 '베드신' 사진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보여 드렸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자꾸 주방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배가 고픈 것이다. 마침 아내가 플래카드를 높이 들며 나를 쳐다보았다. 거기엔 '15분!'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 시간 반으로 잡힌 강의 시간이 15분 남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위기를 직감하고 김탁환 작가의 소설 『참 좋았더라』에서 통영 꼬마 남대일이 스승 이중섭을 찾아 통영 일대를 종횡무진 달리는 부분을 소개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배고픔의 승리였다. 서둘러 강연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뷔페식 음식이 나왔다.


화학조미료나 저렴한 식재료를 배제하고 만든 김은하 대표의 요리는 미각 본능과 재료에 대한 지식, 결단력 등이 환상적으로 서로를 돕는 맛이었다. 쏨땀을 응용한 닭가슴살 자두 샐러드, 부시리와 섭, 새우가 혼합된 카르파쵸, 돼지덜미살 수육과 해홍나물, 김밥, 들깨와 부리타 치즈가 만난 두부, 토마토 치즈 샐러드, 김밥 등 모든 음식이 참가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거기에 곁들인 박준우 건축가의 과하주와 증류주는 화룡점정이었다. 강종희 선생은 구운 자두를 곁들인 해산물 파파야 샐러드가 너무 맛있어서 혼자 4인분은 먹은 것 같다고 고백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사람들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내가 나서서 "아까 못 드렸던 얘기를 좀 더 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전무후무한 2부 강연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메모의 중요성과 산책의 효과에 대해 말씀드렸다. 사진으로 찍는 것보다 직접 손으로 쓰는 게 왜 더 유리한지, 걸으면서 생각할 때는 반드시 혼자여야 하는 이유 등에 대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니 강연 내용이 머릿속으로 쏙쏙 잘 들어온다며 껄껄껄 웃었다. 좀 그악스러운 면도 있지만 그래도 준비해 간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 전달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되었다.


저자 사인을 마치고 참가자들이 모두 돌아간 뒤 주최 측의 식사 역시 2부를 맞았다. 하루 종일 앉는 법이 없이 계속 서서 음식을 준비하던 김은하 대표가 이번에도 역시 주방에 서서 마술에 가까운 안주를 내놓았고 박준우 건축가도 작심한 듯 큰 병에서 소주를 따랐다. 통영에서 맞는 두 번째 '주반의 밤'이었다. 야소주반에 오시는 작가나 강연자는 조심해야 한다. 이 집은 도대체 사람이 빈 속으로 가만히 있는 걸 보지 못하고 계속 뭔가를 먹인다. 그런데 그게 한결같이 고급스럽고 맛도 좋아서 나도 모르게 과식·과음을 하게 된다. 아울러 타인에 대한 따듯한 배려와 사랑도 넘치게 경험할 수 있는 건 물론이다. 술과 요리, 그리고 사람에 반했던 통영 야소주반 북토크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습고 떠들썩하고 슬픈 한일합작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