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톡 라이브 플러스 《ITA Live 입센의 집》
배명훈의 연작소설 『화성과 나』에는 '우주선 동기'라는 단어가 나온다. 지구에서 화성까지 가는 우주선에 함께 탄 사람들은 몇 개월간 한 공간에 갇혀 싫든 좋든 서로의 사생활에서 배설물까지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화성에 도착하는 즉시 서로를 외면하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동기 중 한 여성이 '사람들이 그렇게 섹스를 많이 하는 줄 몰랐다'라고 투덜대는 장면이 기억난다. 독립된 공간이었으면 몰랐을 것을 알게 되는 폐해는 생각보다 끔찍한 것이다.
어제저녁에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ITA Live 입센의 집》을 보면서 배명훈의 소설을 다시 떠올린 건 이 연극의 배경이 사방이 유리로 된 여름별장에서 벌어지는 한 가족의 반백년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을 카메라로 담은 필름을 관람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유리로 된 집을 카메라가 구석구석 비추는 극이기에 시작부터 대놓고 관음적인 시선일 수밖에 없다.
1964년 네덜란드 어느 지방에 사방이 유리로 된 가족 별장이 세워진다. 이름난 건축가인 세이스의 총지휘 하에 조카인 다니엘이 돕는 것을 되어 있지만 사실은 다니엘이 모든 아이디어를 냈고 실행했으며 세이스는 설계도조차 보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기초가 완성된 건물 앞에 서서 경악을 한다. "이게 뭐야, 정신이 나갔군. 다 헐어버려!" 하지만 곧 시대를 앞서가는 이 건물의 가치를 깨달은 그는 급선회해서 자신의 이름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결과적으로 별장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오고 세이스는 건축계의 큰 상을 받는 등 더 유명한 스타가 된다.
하지만 그는 인성에 큰 문제가 있는 호색한이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벌어지는 별장 안에서의 비극은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의 묵인과 외면, 가출 등에 힘입어 더 큰 비극을 만들어 낸다. 나는 입센의 작품을 두 개밖에 안 봐서 잘 모르지만 이 연극은 사이먼 스톤이 그의 작품들을 모으고 재조립해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이야기라고 한다. 작품은 입센뿐 아니라 단테의 『신곡』도 참조한 듯 3막이 '천국-연옥-지옥'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간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도 언급된다(어느 집이나 다 불행해. 톨스토이도 못 읽어봤어?).
1부 95분, 2부 90분, 인터미션까지 총 200분에 달하는 이 연극은 극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몰아치는 사이먼 스톤의 스토리텔링과 배우들의 에너지 넘치는 열연으로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연극에서는 흔한 1인 2역도 화면으로 보니 처음엔 좀 이상했고 1964년부터 2004년까지 종횡무진 전환되는 시간 때문에 머리에 지진이 날 지경이었지만 극에 빨려 들어가다 보니 금세 적응이 되었다. 지난번 전도연 박해수 등이 출연한 《벚꽃동산》의 무대의 원조를 목격한 기분이었고 사이먼 스톤이 작정하고 그려낸 지옥도를 보는 기분이었다. 3막이 '천국-연옥-지옥'으로 구성되어 있다지만 성추문, 폭력, 거짓말, 에이즈까지 나오는 내용들을 생각하면 세 개의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고 실행시킨 사이먼 스톤은 괴물이다. 이래서 사이먼 스톤, 사이먼 스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극장 로비에서 『중세의 침묵을 깬 여성들』 『욕망하는 중세』 등을 쓴 중세미술사 전문가 이은기 선생을 만났다. 우리는 인터미션 시간에 다시 만나 '장면이 하도 바뀌어 헷갈린다' '세이스가 진짜 나쁜 놈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열정적으로 연극을 보러 다니시는 선생이 너무 멋졌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2024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단 2회 상연한다. 이 엄청난 극을 단돈 이만 원이면 볼 수 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당장 가서 보시기 바란다. 할 일 많은 토요일 아침부터 일어나 이 리뷰를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