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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남자 없다니까

보령' 동대누나네'서 있었던 휴지 사건

by 편성준


어제는 아침 일곱 시 반에 차를 몰고 서울로 가서 일을 보고 곧장 다시 보령으로 내려왔습니다. 도착하니 오후 5시더군요. 보통 이 정도 일정이면 느긋하게 서울에서 하루 묵고 다음 날 내려오는 편이지만 어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대천동 시골집 리모델링 작업 때문에 신경이 쓰여 무리를 해서라도 내려오고 싶었으니까요. 명천동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쓰러져 두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더니 어느덧 해가 졌더군요. 저는 침대 위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다 말다 하고 있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뭘 먹어야지. 누나네 갈까?" 그러자 아내가 대답하더군요. "오, 그럼 오랜만에 박대구이나 먹으러 갈까?" 누나네는 '박대구이'가 별미거든요.


그렇게 해서 동대동에 있는 누나네로 갔습니다. 이 집 정식 명칭은 '동대누나네'입니다. 처음 보령에 와서 놀란 게 식당마다 기본 반찬이 참 좋다는 것이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바로 누나네였습니다. 가게로 들어가 테이블 앞에 앉으면 주문을 하기도 전에 나물무침 6종 세트가 나오고 뜨끈한 계란국도 가져다줍니다. 사장님이 직접 담근 시원한 총각김치는 또 어떻고요. 박대구이를 시키고 냉장고에서 참이슬 소주도 꺼내왔습니다. 소주를 마시며 낮에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운 좋게도 방송국에서 희극인 장도연 씨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가 보여준 일에 대한 프로페셔널한 열정과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은 정말 감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그 얘기는 나중에 다른 칼럼으로 쓸게요).


제가 이런 얘기를 두런두런 하다가 아내 쪽 옆 테이블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다 썼더니 사장님이 "휴지 가까이 있는 집사람한테 안 시키고 직접 가져가는 남자가 다 있네?" 하며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편 작가님 같은 남자 없다면서요. 아니, 자기가 쓸 휴지야 자기가 가져가야지 왜 남을 시키냐고 반문했더니 사장님은 "이런 경우 남자들은 백이면 백 다 아내에게 가져오라 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간 큰 남자들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에 놀라 얼른 소주를 한 잔 들이켰고 아내는 "저희 집은 항상 제가 남편한테 뭐 가져오라고 시키는데요."라며 웃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해도 되는 걸 남에게 시키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직장 생활할 때도 남을 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도 꼭 남을 시켰습니다. 그건 먹이사슬 위쪽에 있는 사람의 쾌감과 관계된 일이었죠. 더 거슬러 올라가 중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재떨이를 가져오라고 시키던 것도 생각납니다. 아버지는 안방에 있었고 재떨이도 안방에 있었는데 친구 아버님은 굳이 밖에 있던 아들을 불러 재떨이 심부름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예비역 중장의 딸이었던 대학 동기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군인들은 절대 자신이 직접 안 해. 시키지."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평생 남에게 뭘 시켜 놓고 노는 걸 못해봤던 것 같습니다. 카피라이터로 일할 때는 물론 광고 프로덕션에서 기획실장 할 때도 직접 카피 쓰고 아이디어 내느라 끙끙대는 편이었지 가만히 앉아서 '결재'만 받는 포지셔닝엔 오르지 못했습니다. 물론 동대누나네에선 제가 인격이 훌륭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게 몸에 배서 휴지도 직접 가져다 쓴 것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공처가라서 그렇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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