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들
'글을 연재해야지'라고 생각하면 멀쩡하던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덤벼들어 없던 '결정 장애'가 생기는 것이다. 이럴 땐 글쓰기나 이야기 만드는 법에 대한 권위를 가진 작가의 글을 찾아보면 큰 도움이 된다. 로버트 맥기의 책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STORY)』를 책장에서 꺼냈다.
그는 "작가가 투여한 전체 노력의 약 75%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맞춰진다"라며 이야기를 쓰기 전에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먼저 체크해 보라고 충고하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 집중했다.
첫째,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둘째,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그들은 왜 그걸 원하는 걸까?
넷째,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걸 성취하게 될까?
다섯째,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그 결과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나는 그의 체크리스트에 맞춰 아내와 나를 대입해 보기로 결심했다. 다소 교조적이긴 하지만 이런 것에 기대면 좀 더 입체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노트를 한 장 찢어 맥기의 질문들을 적고 간단하게 답을 달아보았다.
1)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
아내 윤혜자와 남편 편성준이 메인 캐릭터들이다. 윤혜자는 기자 출신의 출판기획자이고 편성준은 카피라이터를 오래 했던 작가이다. 두 사람은 각각 마흔둘, 마흔여섯 살에 만나 연애하다가 결혼했고 아이는 없다.
성북동 꼭대기의 작은 집을 사서 고친 걸 시작으로 개인주택 생활을 시작했고 '성북동 소행성'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내려간 두 번째 주택은 80년 된 한옥이었다. 한옥을 고치는 동안 매일 아침 둘이 현장으로 와서 목수님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도대체 뭐 하는 분들이세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아내가 했던 "예,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은 그대로 나의 첫 책 제목이 되었다.
이 집은 수리 후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매스컴을 여러 번 탔고 'EBS 건축탐구 집'에도 나왔다. 한옥이지만 마루는 에폭시로 마감하여 실용적인 느낌을 살렸고 소파 대신 커다란 탁자와 의자들을 놓아서 세미나나 강연, 모임을 하기에도 좋았다. 첵 쓰기 과정인 '소행성 책 쓰기 워크숍'과 독서모임 '독하다 토요일'도 여기서 열렸고 툭하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들여 밥을 해먹이기도 했다. 한옥이 주는 신기함과 개방성 때문인지 와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얼굴도 못 본 사람들을 무조건 집으로 초대할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이든 '맥락'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2)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보령에서 개인주택을 사서 고쳐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월세로 명천동에 있는 오래된 연립주택 '대보주택'에 일 년 계약을 하고 이사한 뒤 6개월 이상 시간을 들여 살 집을 찾았다. 두 사람이 원하는 조건은 너무 외지지 않은 곳에 있는 낡은 개인주택이었다. 그걸 고쳐서 두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사는 것이 최종 목표다.
지방은 텃세도 있고 매우 방어적이기에 이웃과 어울려 사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 집 주변에 사는 분들은 대부분 80세가 넘은 노인들이다. 그분들에 비하면 우리는 새파란 젊은이들이라 세대차이도 많이 난다. 일단 공사하는 걸 알리기 위해 베지밀 세트를 사들고 집집마다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3) 그들은 왜 그걸 원하는 걸까 :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서 사는 게 싫다. 하루를 살아도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대로 살고 싶다. 보령에 돈을 들여 집을 고친다고 나중에 비싼 값에 팔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오랫동안 꿈꾸었던 삶을 더 이상 미룰 순 없다고 생각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철없는 생각'을 실천에 옮겨보기로 했다. 더구나 이번 집은 뒷마당이 넓어서 나의 집필실을 따로 마련할 수 있다. 안채와 독립된 2층 집필실을 가진다는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설레서 웃게 된다.
4)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걸 성취하게 될까 :
한옥 전문 목수인 임정희 목수님을 부르면 된다. 우리는 서울에 있는 임 목수님과 그 팀을 보령으로 불렀다. 이미 두 번이나 공사를 진행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서로가 원하는 걸 알고 합도 잘 맞는다. 공사 기간은 두 달 정도로 잡았고 공사 비용은 물론 체제비도 우리가 전부 부담하기로 했다.
성북동 공사와는 달리 여기서는 건축사도 구했다. 우리가 잘 모르는 보령이라는 지역이기에 도면은 물론 각종 허가 관련 사항을 도맡아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보령시청의 윤지영 과장님의 도움으로 젊은 건축사 백찬슬을 만날 수 있었다. 백 건축사는 성격이 온화하고 이해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임 목수님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한 편이라 마음이 놓인다. 다만 충청도 사람이라 그런지 말이 좀 느리다.
5)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
물론 돈이다. 공사를 시작하면 언제나 돈이 모자란다. 집값은 5천5백만 원인데(6천5백이었는데 깎았다) 수리비는 그 세 배 정도가 드니 말 다한 것이다. 우리가 예상했던 금액은 이미 초과했다. 임목수님에게 착수금으로 팔천만 원을 입금했는데 곧 오천 만 원 정도를 더 구해야 한다. 집담보부터 신용대출까지 알아볼 수 있는 건 다 알아볼 생각이다.
돈 문제 말고 다른 큰 어려움은 없다. 보통 '집을 짓거나 고치는 사람은 전생에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집주인과 공사 관계자들의 갈등이 심한 편인데 우리는 그런 면에서는 행운아다. 아내와 나는 큰 얼개만 상의하고 나머지는 임 목수님에게 모든 걸 맡기는 편이다. 물론 임 목수님의 인격이나 스타일을 믿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터놓고 상의한다.
6) 그 결과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2025년 2월 17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었고 지붕 공사는 끝났으며 지금은 내부 공사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윤혜자와 편성준은 당분간 서울과 보령을 오가며 집수리 전 과정을 지켜보고 게 될 것이다. 서울에 있는 한옥을 전세로 내주고 얻은 성북동 꼭대기의 작은 월세집은 '금월당'이라 이름 지었는데 금요일부터 월요일 주로 머무는 집이란 뜻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집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남녀의 역할이 뒤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남편 편성준은 이런 일에 별 관심이 없고 주변머리도 없는 편이다. 공간 지각 능력도 형편없어서 평면도 그리는 것도 아내 윤혜자가 하고 공사에 대한 전체적이 계획이나 디테일 등도 전적으로 아내 윤혜자가 다 챙긴다. 그럼 남편은 무얼 하는가. 그는 아내가 하는 일에 찬동하고 전격 지지하는 역할을 맡는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렇다고 편성준이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다. 십여 년 이상 같이 살면서 바뀌지 않은 사실이고 이제는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편이다.
모두 나와 아내 얘기지만 이 정도로 캐릭터와 백그라운드 스토리를 정리해 보니 한결 눈이 밝아진 느낌이다. 이제 이걸 토대로 공사 과정과 거기서 느낀 점 등을 찬찬히 써 보도록 할 생각이다. 기록을 하는 건 중요하다. 그때그때 놓지 않으면 뼈대만 남고 다 날아간다. 아니,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뼈대도 허물어진다.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게 형편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쓰면서 계속 고치거나 보충도 할 생각이다. 아내는 이미 브런치에 이 이야기 연재를 시작했다. 우리가 이러는 이유는 이번의 모험을 책으로 내고 싶기 때문이다(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안도 받았다). 어떤 책이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팩트와 생각들을 모아야 한다. 그게 이 연재의 가장 큰 의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