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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7. 2019

시는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라고

김혜순 낭독회 : 한 권의 시 - [죽음의 자서전]을 완독하는 시간

현대시를 읽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다. 일단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걸 누가 나타나 속시원히 설명해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무리' 읽는 경우부터가 별로 없다. 좀 읽어보려고 애쓰다가도 쏟아지는 낯선 시어들과 기괴한 표현들에 질려 채 반도 읽지 못하고 책장을 닫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나를 어딘가 앉혀놓고 스마트폰도 끄게 한 채 시 한 권을 통째로 다 들려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것도 그 시를 쓴 시인과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목소리로.

어제인 2019년 9월 6일(금)엔 대학로의 '이음센터 이음홀'에선 캐나다 그리핀시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김혜순 시인이 6명의 후배 시인들과 함께 그의 수상 시집 [죽음의 자서전]에 실린 시 49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낭독하는 행사가 열렸다. 나와 아내는 2박 3일간의 지방 취재여행 때문에 무척 피곤한 상태였지만(특히 나는 초보운전인 주제에 차를 몰고 전남과 전북 여기저기 산골들을 수백 킬로미터나 돌아다니느라 지쳐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미리 예약해 놓은 '김혜순의 시 낭독회'가 뭔지 궁금해서 택시를 타고 뒤늦게 대학로로 달려갔다. 행사장 입구엔 이미 많은 관객들이 모여 있었고 이 행사를 기획한 시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 사장님 유희경 시인의 모습도 보였다.

독특했다. 객석 앞엔 콘서트 장소처럼 핀조명들이 켜져 있고 바닥엔 일곱 개의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무대 정면엔 행사에 대한 개요와 함께 '시를 낭독하는 시간 내내 휴대폰 사용 및 촬영 등은 금지되어 있으니 모두 스위치를 끄고 혹시 여의치 않을 경우엔 묵음으로 처리해달라'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비행기 모드'로 돌려놓고 이미 만원인 객석 한 구석 보조석에 겨우 몸을 부려 넣었다. 흥미진진했다. 잠이 싹 달아났다.

무대 정중앙 뒤쪽에 김혜순 시인이 자신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들고 섰다. 그 옆과 앞으로 두 줄을 만들어 성다영, 김상혁, 이제니, 김행숙, 황인찬, 백은선 시인이 차례로 섰다. 놀라운 진영이었다. 그들은 시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농부가 소와 함께 밭에 서서 한 줄 한 줄 밭고랑을 갈아나가듯 한 편씩 한 편씩 시를 읽어나갔다. 지하철에서 죽은 사람의 이야기인 <출근>부터 시작하자 갑자기 어렵던 시들이 몸 안으로 쑥 밀려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가련하다. 한때 저 여자를 뼈가 골수를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브래지어가 젖가슴을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라는 구절이 환해진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시인들이 시를 읽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생각했었는데, 정말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동업자'이기에 시를 다루는 태도나 느낌부터가 남달랐다. 간절하게, 내가 쓴 듯이, 슬프게, 각자가 가진 개성대로, 또는 그 떨림과 머뭇거림 그대로 차례차례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이건 일급 성우들이 배경 음악 속에 매끄럽게 읽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어떤 시는 황인찬 시인과 김상혁 시인, 성다경 시인과 백은선 시인이 한 구절씩 번갈아 읽는 식으로 변주를 해서 청자들에게 새로운 전율을 안겨주기도 했다.

김혜순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은 죽음을 주제로 시인 특유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놓은 시집이다. 읽다 보면 마치 '죽음의 전시장'과도 같은데 그 죽음은 슬프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다. 심지어 죽음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지는 경지에까지 오른다. 이 모든 게 시인 혼자 이룩해 놓은 경지라니. 무대 앞 파워포인트에 펼쳐진 시와 함께 시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상상도 못 했던 표현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지만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예를 들면 죽은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언니를 그리는 <동명이인>이라는 시의 이런 구절들.

집에서는 늘 같이 지낸다

외출도 혼자 한다

그 같이를 뚫고 전화 한 통 온다

동생의 시신을 바다에서 찾았습니다만
너는 네 시신을 찾았대 동생에게 말해준다
그러고도 같이 산다 꿈도 대신 꿔주고 친구도 만들어 준다

그리고 <나비>라는 시 첫 구절에서 죽음을 다루는 이 놀라운 통찰.

네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방법은 이와 같다.

유리창에 대고 입김을 불어본다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본다

탄생이란 항상 추락이고
죽음이란 항상 비상이라 하니
절벽에서 몸을 날려본다

죽고 나면 밀려올 온갖 후회들을 미리 예상해 보고 <죽음의 축지법>이르는 시에서도 이런 아이디어는 여전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까짓 젖가슴  저 고아에게나 줄 것을
이럴 줄 알았으면 이까짓 두 눈동자  저 물고기에게나 줄 것을
이럴 줄 알았으면 이까짓 머리통  저 장미에게나 줄 것을

시인의 상상력은 거침이 없었다. 검은 거울을 바라보며 '그 누가 이 거울물을 찍어 우리 얘기를 쓰게 될까'라고 말하는가 하면 헤밍웨이가 어느 단편소설에서 바텐더의 입을 통해 했던 것처럼 주기도문을 변형시켜 '하늘에 계신 너의아버지. 얼어죽을아버님. 이아이를 달라고네요'라고 중얼거릴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내는 시들을 들으면서 "김혜순의 시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전혀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김혜순의 시들은 단 한 편도 상투적이거나 일반적인 수준으로 내려앉는 법이 없었다. 어떤 시를 만나도 언제나 낯설고 세고 절묘했다.

김혜순 시인은 책 뒤쪽에 붙은 '시인의 말'에서 '이토록 억울한 죽음이 수많은 나라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죽음을 선취한 자의 목소리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토대로 죽음에 대해 골몰하면서 시를 쓰는 동안 무지무지하게 아팠고 어느날 아침엔 어지러워하다가 전철역 승강장에서 쓰러진 적도 있다고 했다. 그때  문득 떠올라 자신을 내려다본 경험이 <출근>이라는 시를 쓰게 했고 그 이후 흐느적흐느적 죽음 다음의 시간들을 적었노라고 하면서 이 시집을 한 편의 시로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시가 49편인 것조차 죽은 자를 달래는 49제처럼 느껴져서 절묘했다.

현대인들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두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꺼야하기 때문에'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 우리는 그럴 정도로 스트폰에 눈과 귀를 빼앗기며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책은 물론  현대시를 읽는다는 건 도대체 엄두를 내기 힘들 정도로 귀찮고 괴롭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시를 읽는 즐거움은 더 클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걸 설명해주는 게 아니라 음성으로 태도로 느끼게 해주는 시인들이 있고, 또 그걸 듣겠다고 비 오는 금요일 저녁에 꾸역꾸역 대학로로 모여드는 한 줌의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래도 우리에게 아직 숨 쉴 틈이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거의 모든 국민들이 '조국 청문회'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던 바로 그 날 저녁이었기에 감동은 더욱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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