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라는 보물 상자

58번국도 연극 《타인》 리뷰

by 편성준

동성 애인 유우코와 살고 있던 나츠에게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닥친다. 유우코가 사고로 입원하자 그녀의 엄마인 하츠에가 딸을 간호하겠다며 도쿄의 아파트로 찾아온 것이다. 호텔비가 너무 비싸다며 여기서 잠만 자겠다고 다짜고짜 밀고 들어온 하츠에. 딸이 친구와 같이 살고 있는 건 알지만 동성 커플인지는 모르는 하츠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날 나츠의 전 애인인 유우미가 나츠에게 새로 생긴 애인 유우코를 봐야겠다며 갑자기 아파트로 찾아온다. 나츠가 잠시 침실로 들어가 있는 사이 열쇠로(헤어진 지 얼마 안 됐다는 증거) 문을 따고 들어 온 유우미는 하츠에가 유우코인 줄 알고 "이번엔 엄청 연상이네!" 라고 마구 퍼부어 대다가 사람을 잘못 본 걸 깨닫고 얼버무리느라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연극은 여기서부터 웃음 코드가 본격적으로 풀리기 시작한다. 유우미 역을 맡은 박지원 배우가 계속 맥주와 물을 원샷하는 것이다. 저러다 진짜 취하거나 오줌보가 다 차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로.


연극 《타인》은 동성애 커플과 그 엄마 이야기를 통해 개인, 젠더, 소수자, 인권, 가족, 세대 문제까지 한꺼번에 넣고 웃음으로 버무린 실내 소동극이다. 구세대인 하츠에는 딸에게 동성 애인이 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지만 금세 쿨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둘 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건 어떠냐는 아이디어를 낸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나츠는 아연실색이다. 자신이 레즈비언인 건 맞지만 그걸 인정해 준다고 곧바로 감읍해서 결혼까지 직진할 정도는 아니며 사람에겐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너무 앞서가지는 말자는 말이다. 일본 사람들은 섬세한 데가 있어서 레즈비언의 커밍아웃 문제까지 당사자의 입장을 아주 조심스럽게 점검한다. 작가 다케다 모모코는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이 손을 맞잡는 장면을 만들고 싶었다'라는 소회를 밝히면서도 극본 곳곳에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장치들을 심어놓는 걸 잊지 않았다.


우리가 대학로에 있는 나온씨어터에 앉아 이렇게 작고 귀엽지만 날카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일본 연극을 볼 수 있는 것은 성실한 '친일파' 나오키 상 덕분이다. 나오키 상의 한국 이름은 나옥희인데 이는 배우 고수희의 예명이리도 하다. 그녀도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다. 그런데 2011년 한일공동제작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에 출연하며 일본어를 공부한 고수희는 일본 희곡이라는 금맥을 발견하고 나서 다양한 일본의 희곡을 접하고 그걸 번역·소개하다가 급기야 2023년엔 극단 58번국도를 창단하기에 이른다. 58번국도는 오키나와에 위치한 일본 최장 국도에서 영감을 받아 '경계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창작의 중심에 둔다. 나는 나오키 상이 계속 경계선 담장 위에 서서 두 나라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 사람이 옥희면 어떻게 나오키면 또 어떤가. 이런 친일파라면 누구나 투 썸즈 업으로 환영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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