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에서 온 불멸과 필멸의 창백한 연대극

연극 《렛 미 인》 후기

by 편성준

모든 멜로드라마엔 그걸 방해하는 요소들이 등장한다. 집안의 반대부터 시작해 연적의 등장, 전쟁, 국경, 신분의 차이까지. 그보다 더 강한 방해요소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법칙'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만약 자연이나 우주의 법칙이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한다면? 예를 들어 차원이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끼리의 만남이라든지. 그런 극단적인 설정이 딱 들어맞는 연극이 어제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본 연극 《렛 미 인》이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소년 오스카와 흡혈귀로 살아온 소녀 일라이와의 만남은 나이와 신분을 떠난다 하더라도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불멸과 필멸의 연대다. 수백 년 전부터 자신을 돌보는 하칸과 살고 있는 일라이는 숲 속에서 마주친 소년 오스카에게 강하게 끌리지만 그건 피 냄새 때문이 아니다.


연연극 《렛 미 인》은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동명 소설(2004년 출간)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이미 2008년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영화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이 이야기는 2011년 영국 국립극단(National Theatre of Scotland)과 던디 리펄토리 씨어터(Dundee Rep Theatre)의 공동 제작으로 무대에 옮겨졌다. 연극 버전의 각색은 극작가 잭 손이 맡았고 연출은 존 티파니, 무대 디자인은 크리스틴 존스, 움직임 디렉팅은 스티븐 호게트가 맡았다.


정글짐 위를 물 흐르듯 움직이는 백승연과 안승균의 움직임은 창백한 전나무 세트를 배경으로 몹시 아름답게 구현되는데 무려 1,200명의 지원자 중 13명이 캐스팅된 이번 연극의 배우들의 움직임이 그토록 좋았던 것은 이 작품이 ‘레플리카 방식'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레플리카(Replica), 즉 정품의 복제를 뜻하는 이 방식은 단순히 해외 원작의 판권만 들여와 해석한 것이 아니라, 원작 프로덕션의 무대, 조명, 의상, 연출의 디테일까지 ‘정밀 복제’했다는 말이다. 숲 속에서의 첫 번째 살인은 물론 일라이를 위해 채혈을 시도하다가 여의치 않게 되자 체육관에서 자신의 얼굴에 염산을 들이붓고 자해하는 하칸, 지현준의 모습까지 그 차갑고도 뜨거운 북유럽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이런 방식 위에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그리고 장엄한 음악이 겹쳐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특히 이게 데뷔작이라는 백승연의 천진하고 느릿한 발성과 딕션이인상 깊었다.


보통 이런 심각한 분위기의 극은 그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객석에서 몸을 뒤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작품은 전혀 지루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태생부터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게 해 줘”와 “그래, 어서 들어와.”라는 말을 주고받은 뒤 어쩔 수 없이 몸과 마음을 던지는 두 소년과 소녀의 슬픈 선택이 긴 여운을 남긴다. 함께 연극을 본 강종희·김혜선 두 장르소설·영화 애호가(그중 한 분은 아예 그게 직업)두 분은 원작 소설과 영화를 모두 보았지만 연극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며 좋아했고 아내 윤혜자는 너무 뒤에서 보는 바람에 배우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며 재관람 티켓을 그 자리에서 또 예매했다. 7월 3일부터 8월 16일까지 극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영화로 보셨더라도, 책을 이미 읽으셨더라도 연극으로 한 번 더 보시라고 강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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