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R. R. 마틴, 찰스 디킨스에서 고원정, 이주희까지
연재물은 언제나 기다리는 팬들의 마음과 구독료(?)를 자양분 삼아 추동력을 얻는다. 그래서 일본의 만화가들 작품을 기다리는 팬들은 처음엔 작가를 숭배하다가 화를 내며 미워하다가 결국엔 지쳐서 징징 울며 매달리기도 한다고 들었다. 김영하의 신작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을 보면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 소설을 쓴 조지 R. R. 마틴의 일부 독자들은 그의 작품 『얼음과 불의 노래』가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세월아 네월아 느리게 쓰는 작가가 드라마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 후속작이 늦어지는 건 뻔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하도 자기를 감시하니까 작가가 화를 내기도 한다. 조지 R. R. 마틴이 미식축구 중계를 보고 있다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 어김없이 "빨리 작품 안 쓰고 왜 미식축구나 보고 있느냐"는 댓글이 달렸는데 마틴도 지지 않고 "화장실 가서 오줌 좀 누고 오는 건 괜찮겠지"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광고회사 다닐 때 내가 '음주일기'나 영화 리뷰 올리는 걸 보고 혀를 끌끌 차며 뜯어말리던 친구들도 그런 심정이었으리라. 내가 올린 글을 보고 광고주들은 당장 "이 자식이 카피는 안 쓰고 또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네."라며 짜증을 냈을 테니까.
찰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를 연재 형식으로 발표했을 때,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한다. 당시 디킨스의 신간이 미국에 도착하는 날이면 뉴욕 항구에는 배를 기다리는 독자들이 몰려들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디킨스의 새 연재 분이 실린 신문이 실린 배가 도착하자마자, 뉴욕 항구에 있던 군중 중 한 사람이 조타수에게 “Little Nell은 살았어, 죽었어?(Is Little Nell dead?)”라고 외쳤다고 한다. 리틀 넬(Little Nell)은 디킨스의 소설 『옛 골동품 상점(The Old Curiosity Shop)』의 주요 인물이다. 이 캐릭터 생사의 운명은 소설 후반부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디킨스는 이걸 가지고 출판사를 쥐락펴락 했으니 많은 독자들이 그녀의 생사를 궁금해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당시 디킨스가 얼마나 대중적으로 인기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내가 목을 빼고 기다리던 첫 작품이 뭐였나 생각해 보니 고원정의 『빙벽』이었던 것 같다. 현철기라는 주인공이 ROTC 장교로 전방에 배치되어 '석천부대'라는 곳으로 가게 되는데 그 부대 이름은 장렬하게 산화한 중대장 장석천을 기리는 뜻이었다. 군대 얘기라고 해봐야 치국과 금례(남자 주인공 이름이 김치국이었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이주희의 소설 『F학점의 천재들』 정도나 알던 나에게 이 소설은 신세계였다. 물론 이문열의 「새하곡」 같은 작품에도 진지하고 사변적인 장교가 등장하지만 고원정이 만든 현철기라는 인물만큼 매력적이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토록 감탄할 작품도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후끈 달아올라 매달 서점에 가서 이 책 나왔냐고 묻곤 하던 추억이 새롭다. 뚜라미 선배인 인엽이 형이 이 책 언제 나오냐고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는 얘기는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많은 게 불가능했던 스물몇 살의 이야기들이다.
* 오늘의 상식 : 이주희의 『F학점의 천재들』
이주희 작가가 고시공부를 하다가 포기하고 군 입대까지 3개월 정도 시간이 남았을 때 쓴 소설이었는데, 나중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물론 연극·영화·라디오드라마·만화 등으로 퍼져 나갔다. 요즘 얘기하는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시조 격이다. 재밌는 것은 작가가 군대에서도 계속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논산훈련소에서 매주 원고를 써서 봉투에 넣어 연무대 터미널에 갖다 주면 고속버스에 실어서 동대문 터미널에서 경향신문 기자가 받아가서 실은 것이다. 그렇게 10개월쯤 연재하고 제대 후에 그걸 다시 써서 단행본으로 출판해서 대박을 쳤다. 이 정도면 작가가 떼돈을 벌었어야 맞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이주희는 1980년부터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 사무국장으로 5년, 지방행정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5년을 일한 뒤 1990년부터 지방행정연수원(현 행정안전부 지장자치인재개발원)에서 전임교수로 20년을 근무했다. 70대가 되어서야 꽁트집을 발간했는데 그땐 이미 기력이 빠진 뒤였다. 소설 애호가인 나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