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선 에세이 『오춘실의 사계절』
아무리 재밌는 이야기라도 거기엔 서러운 시절이 끼어 있어야 한다. 그게 있어야 감정을 움직인다. 인간은 이성을 장착한 존재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감정을 꺼내 드는 동물이니까. 김효선 에세이 『오춘실의 사계절』을 읽으며 한 생각이다. 울컥하는 이야기 속에 진심이 있고 그게 진짜 삶이구나. 김효선은 알라딘 소설 담당 16년 차 MD다. 남의 책 좋다고 추천 평을 써서 생활비를 벌던 그가 어느 날 엄마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열네 살 때 염전에 나가 일한 이후 40년 간 과수원, 식당, 공장, 병원을 돌아다니며 안 해본 고생이 없는 엄마가, 학교 청소부로 13년 9개월 장기근속 끝에 정년퇴직 겨우 두 달 앞두고 허리골절을 당해 이르게 퇴직하며 받은 감사패에 '환경미화 오춘실'이라고 덩그러니 쓰여 있는 걸 보고 김효선은 분개한다. 엄마에겐 더 거창한 인사가 필요하다, 라고 생각한 그는 책을 쓰기 시작한다.
읽다 보면 불행 퍼레이드다. 무학력인 엄마는 평생 청소를 비롯한 허드렛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고 딸은 서울대를 나온 인텔리지만 당시 관리자와의 갈등으로 마음의 병을 얻은 후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적응장애' 판정을 받는다. 그는 알콜에 의존해 일주일에 일곱 번 술을 마셨다. 새벽 다섯 시까지 술을 마시다 잠깐 눈을 붙이고 출근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잠 안 자고 길에서 울고 다닌 대가는 몸으로 왔다. 고아원 출신인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경마, 내기당구, 포커로 돈을 날렸다. 워낙 가난해서 연애할 때도 애인 생일에 생일케이크 대신 롤케이크를 사줬던 남자였지만 애인과 그 가족은 롤케이크에도 감지덕지 그 남자를 사랑했다. 딸은 아빠에게도 그런 불행이 있었다는 걸 미처 몰랐고 어린 중학생이 잘돼서 복수할 수 있는 건 그저 공부 잘하는 길밖에 없다 생각하며 기를 쓰고 교과목 공부를 했다.
이 책은 그렇게 저마다의 불행을 이고 살던 엄마와 딸이 나란히 수영장에 다닌 4년 간의 이야기다. 운동과 체중 감량을 권한 의사 때문에 수영을 시작한 엄마는 자유수영의 '자유'라는 단어에 매료된다. 일을 더 할 욕심에 늘 탄수화물을 과식하던 엄마는 정년퇴직한 후 시계를 보지 않는다. 자고 싶을 때까지 자고 먹고 싶은 만큼 먹는다. 수영도 천천히 배운다. 물에 안 뜨면 뜰 때까지 걸어 다니고 배영을 배운 뒤엔 물 위에 누워 노닥거린다. 알고 보니 수영장 다니는 할머니들은 다 그렇다. 기본 20년 경력이다.
엄마와 딸은 수영장을 병원처럼 다닌다. 딸은 엄마와 늘 싸우면서도 수영장에서 화해를 했고(일주일에 세 번 수영장에 가야 하니 일주일에 세 번은 화해를 할 기회가 생겼다), 엄마는 수영장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한다(우리 남편이 경마를 한다고 하니 다른 할머니는 자기 남편이 화투로 집을 잡아먹혔다고 말했다). 스포츠 헤드폰을 쓰고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수영장을 뱅글뱅글 돌며 비틀즈나 루 리드를 듣는 게 행복의 순간이라 믿었던 딸은 나중엔 수영장 바닥에 가라앉기를 하며 '비우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가장 큰 깨달음은 엄마에게서 왔다. 수영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새 인생이 시작되는 것처럼 노래를 부르는 엄마의 모습이 딸을 감화시킨 것이다. 인생은 재밌게 살아야 하는겨, 라는 멘트는 엄마처럼 고생만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소리였지만 생각해 보니 엄마는 언제나 슬기롭고 정직했다. 아빠가 속 썩이던 시절 자신을 때린 걸 나중에 항의했을 때 엄마는 그때 너무 살기 싫어서 그랬다고 변명하는 대신 화풀이로 때려서 미안하다고 정확하게 사과했다.
김효선은 이미 작가들이 의지하는 소문난 글쟁이지만 이 책에서 특히 그 글쓰기 실력이 물을 만났다. 나는 엄마와 자신의 이야기를 수영장을 배경으로 네 계절에 풀어놓은 기본 골격도 좋았지만 윤성희, 김금희, 이옥선, 고명재, 루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 엘레나 페렌테, 한승태, 정영수, 루시아 벌린, 아니 에르노 등 눈에 익은 작가나 시인들의 이름이 반가웠다. 심지어 이자람이 마르케스의 소설을 창극으로 만든 《이방인의 노래》도 나온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아빠의 도박벽을 언급하며 등장하는 헤밍웨이, 토스토옙스키, 부코스키, 미야모토 테루(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첫 장편 《환상의 빛》 원작자)와 얽힌 이야기들은 안타까우면서도 눈이 부시다. 엄마와 수영장 다니길 정말 잘했다. 그는 요즘도 물에 몸을 담그며 생각한다. '누구 좋으라고 비켜. 사는 게 이렇게 좋은데' 사는 게 정말 좋다는 건 엄마가 김효선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내용뿐 아니라 표지도 대박이다. 앞에는 수영복 입은 '조그맣고 둥그런' 엄마 사진, 뒤에는 수영복 입은 작가이자 딸의 사진이다. 앞으로 책쓰기 워크숍에 오는 분들에게는 나는 이렇게 말하련다. 엄마 얘기나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감동적으로 쓰고 싶다면 김효선 작가의『오춘실의 사계절』이나 안온 작가의『일인칭 가난』을 참조하세요. 특히 '오춘실의 사계절'은 꼭 읽으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