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지음, 문학동네, 2020
정영수 소설가의 작품집 『내일의 연인들』
《기획회의》에 정영수 소설가의 작품집 『내일의 연인들』 리뷰를 썼습니다. 연애 얘기를 쓰기 좋아하는 정영수 작가는 남녀의 이야기와 그를 바라보는 인물을 등장시켜 실제로 경험했거나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친근한 스토리텔링을 구사합니다. 이는 엘리지베스 스트라우트와 비슷한데 아니나 다를까 유튜브(편집자 K)에 출연한 정영수 작가의 말을 들어보니 엘리지베스 스트라우트를 좋아한다고 밝히더군요. 다만 그는 남들이 다 좋아하는 『올리브 키터리지』보다 『버지스 형제』를 더 좋아한다고 하는군요. 저는 김겨울의 《겨울서점》에서 정영수 작가가 필립 로스를 추천하고 다다는 말을 듣고 이미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작품집을 읽고 완전 팬이 되어 칼럼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기획회의 발행인인 한기호 소장님께서 제 글을 올려주셔서 저도 다시 읽고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소장님. 아, 맨 뒤에 붙어 있는 신형철 평론가의 '비명제적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대한 글도 명불허전입니다. 그러니 어서 이 책을 사서 읽으세요.
독립서점에 가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 책방의 분위기와 사장의 큐레이션을 좋아하거나 궁금해해서가 아닐까. 온라인이나 대형 서점에서도 다 구할 수 있는 책이지만 그래도 독립서점에서 추천받으면 뭔가 확실한 취향을 선물 받는 기분이 든다. 서울 종로구 서촌에 있는 ‘서촌 그 책방’에서 책방지기가 권한 정영수의 소설집 『내일의 연인들』을 흔쾌히 집어 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더구나 ‘서촌 그 책방’의 하영남 대표는 자신이 파는 책을 미리 읽고 포스트잇에 짧은 평을 써서 매대에 진열한 책 표지에 붙여놓기로 유명하니까 말이다.
정영수 작가는 가는 곳마다 필립 로스를 추천하는 소설가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서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첫 번째 단편 「우리들」은 ‘연경’이라는 전 여자친구와의 오랜 연애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에게 크라우드 펀딩으로 책을 출간하려는 ‘정은’과 ‘현수’ 커플이 연락을 해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잠깐 얘기를 나눠봐도 지적인 풍모가 느껴지는 두 사람(정은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프리모 레비를, 현수는 레프 톨스토이와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좋아한다)과 만난 ‘나’는 어느덧 그들과 친구가 되어 여름을 함께 보내고 한동안 못 쓰던 글도 다시 쓸 용기를 낸다. 하지만 이렇게 단단해 보였던 지적 토양은 그들이 각각 배우자가 있는 불륜이었다는 사실에서 박살이 난다. 높은 이상이 비루한 현실을 만나 민낯을 드러내는 격이다.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되면서 꿈같던 여름 시절도 막을 내린다.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진작 돌아가야 했는데, 너희들과 노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라고 말하던 ‘치아키’의 말처럼 허전하고 씁쓸한 끝맺음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나’가 두 사람 대신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글쓰기의 발화점이나 과정을 탐구해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표제작인 「내일의 연인들」은 헌신적인 데다가 얼굴까지 잘생긴 남자친구를 돌연 배신하고 새로운 남자와 결혼했던 ‘선애 누나’가 결국 몇 년 만에 이혼하게 되었는데 집이 팔리지 않으니 비워둘 순 없고 친한 후배(엄마 친구의 아들인) ‘정안’에게 와서 잠깐 머물면 어떠냐고 권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마침 ‘지원’과 연애를 시작한 정안은 그 집을 아지트처럼 쓰며 미뤄두었던 두 사람의 첫 성관계 장소로도 사용한다. 급하게 이혼을 결정했는지 그 집엔 두 사람이 쓰던 놋수저와 일본풍 식기들, 배드민턴 라켓, 야구 글러브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정안은 그 물건들을 보면서 그들이 그것들을 살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를 상상해 보곤 한다. 소설의 끝부분에도 나오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건 모두 단순한 이야기가 남긴 흔적일 뿐이다. 누군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 그래서 누군가 누군가를 떠나게 된 이야기. 정영수 작가는 ‘흔한 이야기였다’라고 결론짓고 있지만 세상 모든 흔한 이야기들도 곱씹다 보면 결국 특별해지지 않던가.
책에는 여러 작품이 실려 있는데 공통점을 찾아보면 어떤 관계에 대한 고찰이나 사람에 대해 쓴 글들이다. 특히 남녀 사이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다. 정영수 작가가 정말 연애 이야기 늘어놓길 좋아한다는 건 「기적의 시대」라는 작품을 읽어보면 걸 알 수 있다. ‘은주’와 ‘나’가 부부가 된 뒤에도 서로의 지난 연애에 대해 경쟁적으로, 그리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건 이야기를 통하지 않고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는 정영수의 작가적 본능, 또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정작 이 단편의 메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연희’는 ‘나’와 제대로 사귀지도 않았던 스무 살 시절의 친구다. 이 부부는 연애 경험을 털어놓을 땐 A와 B와 C를 거쳐 E와 F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사이에 있어야 할 D에 대해서는 가끔 시치미를 떼곤 했다. 연희는 그 건너뛴 D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의 주인공은 굳이 연희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그때 연희를 만나게 해 준 ‘성준’ ‘연선’ 등과 ‘나’는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무라카미 류를 거쳐 리처드 브라우티건과 커트 보니것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 주인공 ‘오오바 요조’의 “부끄러움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라는 문장처럼 뭔가 부끄럽고 덜떨어진 시절의 이야기이기에 역설적으로 더 소중해진다. 정작 연희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엉망이야” “망한 것 같아”라고 말하지만 지나고 나니 인생에서 가장 푸르던 시절은 엉망이라고 하던 바로 그때인 것이다.
소설 뒤에 붙어 있는 해설에서 평론가 신형철은 일본의 철학 연구가이자 무도가인 우치다 다쓰루를 인용해 ‘신뢰할 수 있는 화자’는 배울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을 펼치는데 이걸 잘 읽어보면 정영수 작가가 왜 이렇게 ‘글을 쓰는 데 실패하거나, 이상한 연애를 하거나,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줄기차게 써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평범한 이야기들은 ‘이건 이런 것이다!’라는 명제적 지식이 아니라 쉽게 말로 전달되지 않는 비명제적 지식을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비명제적 지식을 배우는 일은 그냥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을 겨우 배우는 데서 멈추는 일이다. 그런 빛나는 멈춤의 순간을 창조하는 것이 작가의 일 아닌가”라는 신형철의 글을 읽고 나니 마지막에 실린 구질구질하고 처연하게 느껴졌던 단편 「기적의 시대」가 새삼 소중하게 다가왔다. 세상에 버릴 경험은 하나도 없다는 나의 평소 신념에 따르면 좋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실패한 연인들, 또는 내일의 연인들 이야기에서도 인생의 비밀을 발견하는 건 소설을 쓰는 작가와 소설을 읽는 독자 사이에만 존재하는 은밀한 합의점이다.
편성준 작가
20여 년간 카피라이터로 근무했다. 2020년 퇴직 후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몽스북),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행성B),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북바이북), 『읽는 기쁨』(몽스북), 『나를 살린 문장, 내가 살린 문장』(메디치) 등을 펴냈고 글쓰기 강연과 책 쓰기 워크숍을 한다. 유머와 위트 있는 글을 지향하며 출판기획자인 아내, 말 많은 고양이 순자와 산다.
<기획회의> 638호 2025년 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