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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에서 영화 번개를 쳤습니다

명보시네마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보던 날

by 편성준


어제 보령의 '명보시네마'에서 '영화 번개'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를 보았습니다. 요즘은 'PTA'라는 약자로 불리는 앤더슨 감독은 이제 정말 거장이 되었죠. 극장에서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의 <팬텀 스레드>를 본 게 마지막이었군요. 저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의 포르노 버전 같았던 <부기 나이트>를 특히 좋아했는데 이번 영화 역시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보령에서 만난 주영 선생, 선주 선생, 아람 선생과 그의 중1 아들 민준이 등 다섯 명이 각자 표를 사서 극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극장엔 사장님인지 실장님인지 일하는 여성이 딱 한 분 계셨는데 관객들이 표를 살 때마다 "원 배틀?" 하고 묻는 등 여유가 넘쳤습니다. 매표소와 매점을 이 분 혼자 돌보는 눈치였습니다. 상영 전 극장 안이 다소 더운 거 같아서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했더니 들어와서 에어컨 스위치도 켜주었습니다. 광고 없이 바로 영화 시작한다고 아내가 기뻐하더군요.


저는 사실 이 극장이 이름만 남고 영업은 안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보령시립도서관에서 제 수업을 듣는 분들이 알려줘서 다시 관심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오래되었고 작지만 이런 극장이 동네에 남아 있다는 건 소중한 일이죠. 보령시네마는 관객이 한 명일 때는 상영을 안 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내가 번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정말 이러다가 하나 남은 극장마저 없어질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도시에서 문화가 사라지면 젊은이들도 사라진다'라는 게 아내와 저의 생각입니다. 번개 친다고 당장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동네에 있는 극장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렇게라도 하는 게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의 시작기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영화 초반 빌드업 때 성애 장면이 몇 번 등장하자 "나 집에 갈래!"라는 중학생의 항의가 있었고 곧바로 "미안해. 엄마도 이럴 줄 몰랐지."라고 사과를 하는 등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그래도 2시간 40분간 너무 재밌게 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숀 펜, 테야나 테일러, 체이스 인피니티, 베니시오 델 토로 등등 배우들의 연기도 정말 만족이었습니다. 영화 리뷰는 오늘 저녁에 따로 쓰겠습니다.


끝나고 극장 맞은편 법원 근처 포장마차촌에 있는 가게로 들어가 박대구이와 오징어볶음 등을 시키고 소맥을 마시며 영화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습니다. 이러려고 번개를 친 거니까요. 생각보다 안주값이 비싸서 약간 기분을 잡쳤지만 전체적으로 좋았습니다. 저희는 앞으로도 가끔 보령에서 영화 번개를 칠 생각입니다. 생각 있는 분은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보령 하늘이 가끔 번쩍이면 그들이 또 영화 번개를 쳤군, 하고 여겨 주십시고. 시작이 반이고 시작이 곧 성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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