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마지막 대화

엄마라는 글씨만 봐도 눈물이 날 때가 있다

by 편성준

이미 팔순이었고 뇌경색으로 한 번 쓰러진 경험이 있던 그녀는 어느 날 안방에 항상 깔아놓는 이불 위에서 살짝 주저앉은 것뿐었다는데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앰블런스에 실려간 엄마는 병원에서 혈액검사, CT 촬영 등 각종 검사를 받느라 이러저리 옮겨 다녀야 했으므로 아픈 몸이 더 아파졌고 말이나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독실이나 이인실을 알아봤지만 입원실이 모두 차서 6인실에 모셔야 했다. 형과 내가 번갈아 엄마 옆 침대에서 자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다. 의사들은 '위기는 넘겼지만 좀 더 지켜보자'라는 무책임한 의견 말고는 다른 어떤 코멘트도 해주지 않았고 간호사들도 기계인간처럼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입원실에서 당번을 서기로 한 날 밤, 문득 그녀의 말문이 터졌다.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엄마가 신기했다.


내가 개성에서 덕경이랑 같이 내려 올 때 말이야... 엄마, 말씀을 하시네요? 그래. 그때 식구들하고 며칠 만에 만나기로 해놓고 나만 덕경이랑 먼저 내려왔는데...엄마의 목소리는 컸다. 얼마나 컸냐하면 입원실 전체가 쩌렁쩌렁 울려 탁자에 놓인 주전자가 흔들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미 늦은 밤이라 같은 방에 있는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이 다 잘 시간이었지만 나는 차마 엄마에게 여기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 조용히 하시면 어떠냐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갑자기 모든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 같았다.


전쟁이 터져 개성에서 급히 친구 한 명과 먼저 피난 내려오던 얘기를 했다. 며칠 후 남쪽에서 식구들과 만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삼팔선이 막혀서 그대로 생이별이 되었고 자신이 내려온 그 날 즈음을 사람들이 '1.4후퇴'라 부른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갓 스무 살 소녀 둘이 내려왔으니 생계 대책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어찌어찌 부산까지 흘러 내려가 '미제 장사'를 했단다. 한겨울에 사흘 동안 냉방에서 덜덜 떨며 잔 적도 있었고 평균 하루에 한 끼씩 보리밥이나 보리죽을 겨우 먹었다고 했는데 그때 하도 보리밥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나중엔 보리쌀 가운데 갈라진 모양만 봐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평소에도 보리밥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개성에 살 때 얘기도 했다. 자린고비였던 아버지가 '계집애'라고 고등학교를 보내지 않으려고 해서 엄마와 둘이 몰래 새벽에 나와 시외버스를 타고 호수돈여고로 시험을 보러 갔었다고 했다. 호수돈여고 다닐 때 명절 때만 되면 떡이며 과일이며 먹을 걸 잔뜩 싸가지고 오던 룸메이트 여학생의 엄마 얘기도 했다. 그 동창은 공부를 열심히 안 하는 아이였는데 시험 때가 되면 그녀와 달리 컨닝 페이퍼를 만들어서 성적을 유지하곤 했다며 웃었다.


본가는 가난한 농군집이었지만 외가쪽은 엄청난 부자였다고 회상하며 '서양년'들처럼 큼직큼직하고 시원스럽게 이뻤던 곱슬머리 외가 고모들 얘기도 했다. 고모들이 유난히 작고 약한 그녀를 매우 예뻐해서 방학때만 되면 고모들 집에 놀러 가는 게 너무나 즐거웠다고 했다. 중구난방 아무말 대잔치라 전에 들었던 얘기도 있었고 생전 처음 듣는 사연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 어느 때보다 그녀의 개인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밤새도록 네,네, 그랬군요, 하고 맞장구나 칠 뿐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막 지나 병원 창밖으로 보이는 길거리는 쓸쓸했다. 날이 훤하게 밝아올 때쯤 내년 5월에 있을 내 결혼식 얘기를 했다. 엄마는 생전 결혼을 안 할 것 같았던 막내아들이 뒤늦게라도 결혼식을 한다고 해서 친구들에게 잔뜩 자랑을 해놓은 상태였다. 결혼식 날짜를 잡은 내가 어머니는 무슨 옷을 입고 가시면 좋을까 물었더니 얼마 전에 맞춘 까만색 한복을 손봐서 입으면 된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한복 얘기를 하던 끝에 그녀는 까무룩 잠이 들었고 그대로 혼수상태가 되었다. 이틀 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에게 더 묻고 싶은 것도 있었고 해주고 싶은 얘기도 있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나는 무참히 눈물을 뿌리며 황망해할 뿐이었다. 2012년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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