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외 『엔딩은 있는가요』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집행 날짜를 모르고 사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다 누군가의 삶이 불현듯 멈췄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린 다 똑같은 사형수인데 하필 왜 그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아은 작가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고우리 대표를 비롯해 장강명, 김하율, 김현진, 소향, 정명섭, 조영주, 주원규, 차무진, 최유안 등 9명의 작가들 역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살아생전 정아은 작가는 7권의 소설과 5권의 논픽션·에세이를 썼다. 그의 관심사는 부동산 문제부터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어느 한 분야도 허투루 쓰지 않는 뛰어나고 성실한 작가였다. 그런 그를 동료들은 좋아했고 정 작가 역시 동료들을 사랑했다. 출판평론가 김성신은 단짝이었던 편집자 고우리와 작가 정아은 두 사람을 가리켜 '끓는 주전자처럼 재미있는 소리를 낸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 차례 추모는 이미 있었다. 정아은 작가의 에세이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북토크 뒤풀이 맥주집에서 즉흥적으로 기획되었던 앤솔러지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는 약속된 멤버였던 정아은 작가만 빼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던 마름모의 고우리 대표와 작가들은 작정하고 정아은 작가의 관심사 중 하나씩 골라서 소설을 쓰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이 『엔딩은 있는가요』다. 작가는 긍극적으로 쓰는 사람들이니 추모와 애도 역시 글로 영원히 박제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다행히 참가를 결정한 작가들은 추모집이라고 슬프고 거룩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기획 의도에 동의했다. 그래서 작가들의 개성과 문체가 제멋대로 살아나는 떠들썩한 작품집이 완성되었다.
내게 가장 좋았던 작품은 맨 앞에 실린 차무진의 「그 봄의 조문」이다. 자신의 작품을 제일 먼저 알아주고 신문에 서평을 써 준 정아은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 차무진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한 두 소년을 장례식에 등장시켜 정 작가를 조문하게 한다. 두 소년 역시 작품 속에서 죽었기에 이제 막 세상을 떠난 정아은 작가와 두 소년이 병원 복도에서 잘 가라고, 또는 어서 오시라고 따뜻하게 서로를 품는 장면은 애틋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소설가에게는 상상력을 펼칠 펜과 머리가 있으므로 이런 초능력도 가능한 것이다.
장강명 작가는 부동산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정아은을 위해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탄생시킨다. 전세 사기 피해자 신탁이 나와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데 그 코너 이름이 '신탁의 마이크'인 것이다. 취재 잘하기로 소문난 장 작가답게 신랄한 코미디언의 말투는 물론 전세 사기를 당할 수밖에 없는 허술한 법 제도의 모순에 대해서도 '어쩌면 이렇게 잘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코미디언 문체와 분위기로 시종일관 독자들을 샌드백처럼 두들긴다.
김현진의 「오만과 판권」은 정아은 작가가 제일 좋아했다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패러디한 단편이다. 처음엔 창비와 문학동네를 '창배' '문화동네' 같은 식으로 바꾸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뒤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에서 '언니를 한번 웃겨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썼다는 걸 알고 나니 작품이 다시 보였다. 특히 빈 리의 두 여동생이 마을버스를 타고 평창동 골목길을 올라온 리지에게 "세상에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다니요! 숙녀답지 못하고 야만스러워라!"라고 하는 장면은 원작과 너무 똑같으면서도 달라서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밖에도 작품의 모티브가 된 섹스 코드만 빼면 그대로 아련한 한 편의 동화로 변하는 조영주의 「홍대 앞집엔, 그녀가 산다」는 너무 사랑스러웠고, 전두환을 모티브로 어린 시절의 기분 더러웠던 기억을 소환한 정명섭 작가의 「돌의 던지다」도 우스운 시대상을 우화로 그려낸 소설이었다. 전두환을 소재로 쓴 작품이 하나 더 있는데 주원규의 「특약 사항」이다. 이 작품은 정아은 작가의 관심사였던 '잠실동'과 '전두환'을 한 데 묶은 것만으로도 절묘한데 그 끝이 부조리극이라서 더욱 놀라웠다. 작품의 구도 자체가 예술이었다. 만약 저승이라는 게 있다면 정아은 작가가 읽어도 기뻐할 소설들이다. 나의 작품 평은 여기까지다. 김하율, 소향, 최유안 작가의 작품들 역시 하나하나 다 좋으나 여기다 다 썰을 풀면 너무 수다스럽고 번잡하니 나머지 작품들은 당신이 사서 직접 읽어 보시고 의견을 말해주시기 바란다.
어슐러 르 귄은 어두운 골목길에서 누군가 날카로운 칼을 들고 나타나 "죽기 싫으면 위대한 미국 문학의 이름을 대!"라고 말한다면 "분노의 포도!"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썼다. 나 역시 비슷한 질문을 받으면 "최근엔 엔딩은 있는가요라는 책이 재밌더라고."라고 대답할 테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줄을 치고 메모를 하면서 이틀 만에 완독했다. 그만큼 흡입력이 좋다는 뜻이다. 아, 이 책 뒤에 북펀드 독자 명단엔 강양구 기자와 김성신 출판평론가, 임지형, 작가를 비롯해 블랙버드 북숍, 수북강녕 같은 책방 이름도 있고 장강명, 조영주, 차무진, 최유안 등 참가 작가 이름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쯤에 내 이름도 있다. 기역니은 순으로 실어서 그런 것이지 내가 꼴등이라 그런 건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