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 만난 외로운 남자

욕망, 갈등, 싸움에 대한 생각들

by 편성준

설날 연휴 마지막날인 오늘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혼자 동네 봉산 산책로를 걸었다. 명절 기간의 게으름으로 인해 관절이 삐걱거리고 몸이 좀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어제부터 다시 보기 시작한 15년 전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한석규와 장혁, 신세경, 윤제문 등 실로 대단했던 출연진을 생각하고 극본을 쓴 박상연 작가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을 쓴 사람이기도 하지, 하며 어느덧 상념에 빠져 한참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함 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멈추고 쳐다보니 큰길에서 비켜난 언덕에 파란색 윈드브레이커를 입은 초로의 남성이 전화기에 대고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야 그 얘길 왜 여기서 꺼내는 거야? 자기, 그때 내 편들었어, 안 들었어? 돈을 떠나서, 응? 사람이라는 게 감정의 동물인데 어떻게 화가, 아니, 나는...... 아니 , 나는...... 아, 글쎄 내 얘길 들어 보라니까! 그때 너 오백 받았잖아. 난 천 받고. 그럼 그걸 왜 줬겠어? 아, 그때 얘길 허지 왜 안 하고 내동 있다가 이제 와서 엉뚱한 소릴...... 아니 아니, 글쎄 내 말을 들어보라니까.


듣다가 민망하기도 하고 그쪽에서 날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해서 얼른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같은 가족이나 친척이라도 명절에 만나면 묵은 갈등과 섭섭함이 올라오기 마련이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고향 친구라도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게 명절 인심이다. 파란색 윈드브레이커 남성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 어제 아내에게 "예전에는 명절이면 가족끼리의 참극 뉴스가 꼭 한두 꼭지 있었는데 요즘은 없네."라고 말하자 아내는 우리가 레거시 미디어를 잘 보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모방범죄 염려 때문에 요즘은 그런 사건 보도를 자제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하긴 그렇다.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명절 스트레스가 갑자기 줄거나 가족 분쟁이 없어질 리가 있나. 아니나 다를까 오후에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올해도 70대 남편이 60대 아내를 흉기로 살해하고 자수한 사건이 있었다.

조그만 암자가 있는 곳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다 보니 그 남성은 아직도 언덕 위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가 참 외로워 보였다. 나도 저렇게 싸울 때가 있었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한두 번씩은 얼굴을 붉히고, 소리를 지르고,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자다가 잠꼬대를 할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억울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평온해 보이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재즈 바를 운영할 때 거친 손님들과 멱살잡이를 하고 싸우다 집으로 돌아와 부엌 식탁에 앉아 소설을 썼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이젠 다 지나간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 모든 번뇌와 갈등이 사라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세상에 전쟁이 사라진 적이 한 번도 없듯이 개인의 괴로움도 잦아드는 법이 없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누군가와 싸운다는 건 그 자체로 불안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증거다. 옳고 그름에 대한 다른 생각, 입장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욕망, 질투, 섭섭함, 자존심에 입은 상처, 돈을 둘러싼 모든 갈등 등이 씻은 듯 사라질 리가 없다. 어느 누구도 이런 번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부처님도 '인생은 번뇌의 바다'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파란 윈드브레이커의 그 남자가 웃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누구에게든 흐린 날씨 뒤엔 햇볕 쨍한 날도 오는 법. 다만 오늘은 그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아야겠다. 나를 위해, 남을 위해. 그리고 아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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