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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09. 2019

잘 쓴 글을 읽는 기쁨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시의 천사'라는 글

나처럼 뭔가 떠오를 때 급하게 휘갈겨 쓰는 사람은 그 타이밍의 압력에 눌려 더 깊이 생각하고 가다듬는 시간을 갖지 못할 때가 많다. 실제로 내가 쓴 글을 당장 어딘가에 올려버리지 말고 하루나 이틀 정도 묵혔다가 다시 천천히 읽어보고 탈고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충고를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 그런 반성이 들 때면 오래도록 고민하고 망설였다가 썼을 것만 같은 잘 쓴 글들을 찾아 읽는다. 가령 평론가 신형철이나 김현, 김훈, 장석주의 글들이 그렇다.


방금 신형철의 책을 아무 데다 펴서 한 챕터를 읽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진은영 시인에 대해 쓴 <시의 천사>라는 산문이다. 여기서 신형철은 진은영이 시를 쓸 때뿐 아니라 현실참여적인 글을 쓸 때도 빛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물조차 언제나 아름답다는 얘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런데도 그 결과물은 언제나 아름답다. 다른 시에서는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놀라운 직유들을 그는 어린아이가 과자를 흘리듯이 한 편의 시 안에 아무렇게나 흩뿌려놓는다. 그가 제아무리 헌신적으로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의 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고 존경하기만 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말에 질색하고 시에서 그 가치를 수상쩍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들이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얻은 것들에 조금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시는 세계와 싸울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다움과 함께 싸워야 한다."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면서 형식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춘 시를 쓰는 시인을 칭찬하는 글을 이토록 멋지게 쓸 수가 있을까. 제주도의 어느 시골집 식탁에 홀로 앉아 잘 쓴 글을 읽는 기분 좋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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