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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17. 2019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

[독하다 토요일 시즌 3] 마지막 모임

독하다 토요일 시즌 3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


금요일 오전 11시 5분, 제주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한 달간 제주도에 혼자 머물며 책 읽고 글 쓰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작정하고 내려갔지만 딱 하루 예외로 해야 할 날이 있었으니 바로 독서모임 <독하다 토요일>이었습니다. 물론 아내인 윤혜자 씨가 회원들과 함께 진행해도 큰일이야 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어제는 독하다 토요일 시즌3의 마지막 모임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지난번엔 저희가 취재 여행을 다니느라 오프라인 모임을 열지 못한 적도 있구요. 어쨌든 이제 마지막 책 [태연한 인생]까지 왔습니다.

2019년 11월 16일 토요일 오후 2시에 영등포에 있는 카페 '곁愛'로 윤혜자 씨와 제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곧이어 서동현 씨도 왔습니다. 우리는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며 인사를 나누었고 3시경까지 각자 가져온 책을 읽었습니다. 김하늬 씨가 오고 김은주 씨, 정아름 씨가 왔습니다. 오늘은 카페 옆에 있는 '비덕살롱'에서 송년회까지 하기로 했기 때문에 각자 마실 것을 하나씩 준비하기로 했는데 정아름 씨는 깜빡 잊고 와인을 두고 나와 그걸 가지러 다시 집으로 가는 바람에 늦었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조금 늦은 임기홍 씨까지 오자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읽고 함께 얘기해 보기로 했던 책은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이었습니다. 이번 시즌의 주제는 '작가들의 리즈 시절'로 대한민국의 중견 작가들이 한창 잘 쓸 때 발표했던 대표 작품을 찾아서 읽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래서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시작으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포기할 권리가 있다], 박범신의 [더러운 책상],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을 거쳐 마침내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은희경 정도면 무슨 책을 선택하더라도 기본은 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이 책을 선정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기대에 많이 못 미치는 작품이었습니다. 캐릭터가 시니컬하더라도 주인공에게 반감이 들진 않아야 하는데 이 소설은 지나치게 냉소로 일관하는 요셉에게 동감을 느끼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작가가 당시에 글이 너무 안 써져서 카페를 전전하면서 소재를 채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은 사건의 전개보다는 지나치게 상념적이고 사변적인 글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매우 안 좋은 느낌으로 읽은 것에 비해 서동현 씨는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어제 오늘 뒤늦게 읽기 시작한 이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밥 먹는 것조차 놓치고 그대로 모임 장소에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너무나 다른 소감이라 정말 의외이면서도 다행이란 생각을 하면서 그의 독후감부터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서동현 씨는 소설을 아직 끝까지 읽진 않았지만 요셉이라는 뒤틀린 캐릭터가 독특하고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요셉이 하는 행동이나 말에 다 공감하기는 힘들고 마음에도 안 들지만 감정 이입 없이 지켜보는 입장으로 읽어보니 뭔가 굴 속에 들어가 스스로를 가둔 고슴도치처럼 짠한 느낌이 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혼자 커피 마시러 갈 카페 하나 고를 때도 오만가지 기준을 내세우며 갈등하는 그 쪼잔함이 참 피곤하면서도 불쌍해 보였다고 하며 웃었습니다.

집에 다시 다녀오느라 조금 늦게 도착한 김하늬 씨가 카운터에서 음료수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빨대'를 가져왔는데 정말로 음료수를 빨아먹은 뒤 빨대를 와드득 와드득 깨물어 먹어서 모두들 놀랐습니다. 식재료로 만들어진 빨대를 계속 깨물어 먹던 하늬 씨가 "이 빨대 중독성 있는 것 같아요."라고 해서 모두들 웃었는데 서동현 씨가 요셉이 그  빨대처럼 은근히 중독성 있는 인물이라 했습니다. 그 얘기를 그대로 받아서 김하늬 씨도 "빨대 같은 소설이었다"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자기는 이 책을 2014년 4월에 읽었는데 읽었다는 기억만 나고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주인공이 되게 싫었던 기억 때문이라 했습니다. 일단 요셉의 내면 묘사를 읽는 게 괴로웠는데 사건은 없고 순간순간의 묘사만으로 내용을 이끌어가는 캐릭터에 끝내 정을 붙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태연한 인생'이라는 제목에 대한 얘기도 몇 번 나오는데 소설가의 설명처럼 누구나 저마다 괴로운 일이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다는 게 제목의 의미이고 만약 그런 게 인생이라면, 자신은 왜 맛없는 빨대를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씹고 있지? 하는 생각의 연장선에서 '이런 재미없는 책을 왜 읽고 있지?'까지 달려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이들이 쓴 평을 좀 찾아봤는데 요셉은 현재 40~50대 대한민국 남성의 전형적인 캐릭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개중에는 그런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구나 깨닫게 되면서 '이렇게 다양한 독후감을 이끌어 내는 걸 보면 작가가 잘 쓴 것 같긴 하구나' 하는 복잡한 심정까지 되었다고도 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책을 읽으면서 당시 작가가 처했던 상황이 입체적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작가가 뭔가 쓰기로 출판사와 계약을 했구나. 그런데 글이 안 써져서 괴로웠겠구나. 고심하다가 카페에서 글을 쓴다는 작가들도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카페를 전전하게 되었구나. 그러면서 그즈음 자신이 만났던 캐릭터 중 가장 재수 없는 인물 하나를 고르고 거기에 가상의 캐릭터를 복합적으로 겹쳐 보았겠구나... 그런데도 화가 나는 건 '나 정도면 이런 소재 가지고도 이 정도는 쓸 수 있어'라는 뽐내는 듯한 거만함이었다고 했습니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찌질한 캐릭터 생각도 났고 류라는 캐릭터는 이후 은희경의 다른 소설에서도 매우 시크한 유형으로 다시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특히 기분 나쁜 것 중 하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씨나리오', '씰루엣'처럼 맞춤법을 무시하고 일부러 쓴 쌍시옷 표기였다고 했습니다. 뭔가 차별화를 이루기 위해 쓴 게 역력한데 그 의도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하늬 씨도 그 얘기에 동감한다면서 정유정의 [7년의 밤]을 읽어보면 작품 앞부분에 아들이 쌍시옷으로 된 단어를 쓰던데, 그럼으로써 마치 십여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효과가 났다고 했습니다. 은희경이 굳이 쌍시옷으로 고집한 것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라는 의견에 다른 회원들도 얘기를 시작해서 많은 의견이 오고 갔습니다.

김하늬 씨가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쌍시옷을 쓴 부분에서 갑자기 요셉의 시선으로 넘어가는 느낌이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날카로운 해석이었습니다. 윤혜자 씨는 그럼으로써 생겨나는 남자의 시선이 참으로 불편했다는 얘기를 했고 그 얘기는 최근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소설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로 넘어가 한참 페미니즘과 시대에 대한 난상토론이 펼쳐졌습니다.

김은주 씨는 초판본을 읽었는데 전혀 기억이 전혀 안 나서 왜 그런가 과거를 더듬어 보니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가의 에세이 같은 느낌이 강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작가들이 소설을 쓸 때 사실은 이렇게 시시해'라는 얘기를 전해 들은 것 같다는 것이었죠. 얼마 전 소설가 김영하가 팟캐스트에서 이 소설 얘기를 다루면서 지은이가 요셉을 통해 문단 내의 남자들을 비판적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 얘기는 김은주 씨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은희경이 '유사 남성'으로 분해서 자기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털어놓았다는 게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김은주 씨도 '소설가가 글이 안 써져서 억지로 억지로 쓴 것 같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은희경이 아니라 요셉이 쓴 소설 같다, 소설을 착하게 쓰려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야, 라는 요셉의 말은 작가의 변명 같더라, 새의 선물은 재밌었는데, 이건 내 말이 아니고 누가누가 한 말이야,라고 주석을 다는 요셉은 정말 재 수 없었다, 등등 요셉을 향한 파편적인 뒷담화가 들불처럼 일어났다가 겨우 꺼졌습니다.

그러다가 임기홍 씨가 요셉은 류를 자기가 엄청 사랑했던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말하고 말끝마다 '우리는 정말 찐한 사랑을 했다'라고 외치지만 정작 류도 그랬을까?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토록 류와 서로 사랑을 했다던 요셉이 소설 마지막쯤에 가서는 류한테 한 번 더 버림을 받으니까요. 소설이 가진 덕목 중 하나는 주인공이 어떤 고난을 겪고 그를 통해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이 소설엔 그런 게 없어서 아쉬웠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결국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쓴 게 아니라 요셉이 끊임없이 새로운 여자를 갈구하듯이 소설가도 계속 뭔가를 써야 한다는 강박으로 쓴 소설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류가 과거에 주었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셉은 아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분리불안을 겪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이별의 이유를 알고 싶으면 거울을 보면 되는데 요셉은 끝까지 자아성찰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도경이라는 여성이 요셉에게 일방적으로 잘해주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고 했더니 임기홍 씨도 '반페미니즘적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은 구원의 여인이거나 안달 난 창녀이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윤혜자 씨와 김하늬 씨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경의 그런 행동에 묘한 통쾌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요셉을 만나면 늘 돈도 내주고 섹스도 해주는 도경은 알고 보면 자신의 욕망에 매우 충실한 캐릭터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에게 잘해주는 것처럼 굴지만 결국 요셉을 가지고 노는 건 도경이라는 얘기였죠. 도경은 결핍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그랬습니다. 역시 남자들보다는 여성 독자들의 눈이 매섭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서동현 씨는 원래 쓰려던 작품을 쓰지 못하고 헤매던 작가가 결국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 이야기'를 쓰기로 한 것 같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카페에서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누가 자기 랩탑을 훔쳐가지도 않는다고 화를 내는 요셉에게서 은희경의 괴로운 심정을 훔쳐본 것 같아서 한참 웃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방송작가로 일하는 김은주 씨가 정말 글이 안 써질 땐 갑자기 컴퓨터가 업그레이드한다고 갑자기 전체가 판란 화면으로 바뀌는 게 반가울 때도 있다며 웃었습니다.

이혼도장을 찍을 때도 요셉은 일관되게 찌질하다고 김하늬 씨가 얘기하자 요셉은 돈도 없으면서 맨날 택시만 타고 다닌다는 윤혜자 씨의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요셉은 읽을수록 시대 남자애처럼 느껴진다는 김하늬 씨의 말에 남자는 어차피 철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들이 쏟아졌고 그 밖에도 아주 감정에 치우치고 공론의 장에 오르지 못할 것만 같은 중요하지 않은 소감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즐거웠습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읽었더라도 이 모임에 와서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덧 작품에 대한 애정이 생겨나고 작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신기한 경험을 매번 하고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년엔 시즌 4가 시작될 텐데, 이때는 무슨 책을 어떻게 읽을까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동안은 한국 소설만 고집했었는데 이제는 지평을 좀 넓혀 외국 소설을 번갈아 읽거나 노밸문학상 수상작 같은 걸 조금이라도 원서와 비교해 가면서 읽는 것도 괜찮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동안 한국 소설만 한정해서 읽다보나 뭔가 갑갑증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아이디어를 모아 보기로 했습니다.  

저녁 5시가 되자 독서토론을 마치고 옆에 있는 '비덕살롱'으로 가서 최정은 대표가 마련한 음식을 먹으며 뒤풀이 겸 송년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흑보리샐러드와 가을샐러드, 명란호박탕, 불고기 등등 비덕살롱의 음식은 엄청 신선하고 좋은 재료와 직관적이고 과감한 레시피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살찌웠습니다. 개인적으로 명란호박탕은 정말 훌륭한 안주요, 국이었습니다. 중간에 최정은 대표가 1953년부터 이 자리에서 소외된 여성들을 돕게 된 사연과 비덕살롱의 변화되는 모습들을 짧게 설명해 주셔서 더 뜻깊고 고마운 자리였습니다. 책을 읽으러 온 건지 먹으러 온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회원들은 맛있는 음식과 각자 가져온 와인, 샴페인 등을 먹고 마셨습니다. 마지막에 1리터도 더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배가 찬 우리들은 호흡곤란을 느끼며 헤어졌고 결국 같은 동네에 사는 서동현, 윤혜자, 편성준 회원은 성북동에 있는 '만섬포차'에 가서 소주를 각 일 병씩 더 마시고 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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