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꿈 이야기
일요일 아침에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에 잠깐 다녀왔는데 아내가 침대에 누워서 잠이 덜 깬 상태로 고맙다느니 감동했다느니 하며 엉뚱한 소릴 자꾸 하는 것이었다.
혜자 : 오빠, 고마워.(아내는 지금도 급하면 여보 대신 오빠라고 부른다)
성준 : 뭐가?
혜자 : 내가 에이즈에 걸렸는데도 나를 사랑해 줘서. 흑흑.
성준 : 무슨 소리야?
혜자 : 꿈을 꿨는데(내가 당신하고 결혼하기 전이야)
마침 세상에 에이즈가 대 유행인 거야.
근데 에이즈에 걸린 애들은 회사에 안 가도
월급을 주고 사람들이 막 잘해주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도 에이즈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했지. 회사 가기 싫어서.
그랬더니 당신이 진짠 줄 알고 엉엉 울면서 너무 슬퍼하는 거야.
내가 에이즈에 걸렸으니까 헤어지자고 해도 안 된다고 하고...
성준 : 그래서?
혜자 : 근데 점점 일이 커지는 거 있지.
당신이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에이즈는 위험한 게 아니다. 에이즈 환자는 보호받아야 한다”
이러면서 시위를 하고.
와, 일이 점점 커지네,
이제 와서 거짓말이라고 하면 당신이 얼마나 화를 낼까....
막 이런 걱정을 하다가 깼어.
성준 : 근데 난 꿈속에서도 왜 그렇게 바보 같냐?
에이즈라고 하면 일단 병원에 가서 좀 알아볼 것이지....으이구.
혜자 :그러게....좀 바보 같긴 하네. 히히.
우리는 침대에 누워서 꿈 얘기를 계속했다. 내가 바보 같은 거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요즘은 당신도 나를 닮아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걱정을 했더니 아내는 상관없다며 웃었다. 예전에는 똑소리 나게 살려고 노력을 했는데 이제는 약간 바보스럽게 손해도 좀 보고 양보도 하면서 사는 게 더 나은 인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처럼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고 인격적으로 존중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크게 욕심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보 같이 살아도 된다는 아내의 통찰과 배포에 놀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웃고 넘겼지만 만약 아내가 진짜로 에이즈에 걸린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간단하다. 거꾸로 내가 에이즈에 걸렸을 때 아내가 어떻게 할까를 유추해 보면 된다. 아마도 그녀는 전 재산을 다 팔아치워서라도 나를 가장 좋은 병원에 입원시키려 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사들을 수소문해서 제발 한 번만 도와달라고, 당신의 가진 능력을 총동원해서 내 남편을 꼭 살려 달라고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빌 것이다. 그러나 내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고 늘 생글생글 웃으며 농담을 할 것이다. 그리고 비싼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다 할 것이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현대의학이 병을 이기지 못하고 도저히 손을 쓴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고 함께 약속하고 서명했던 서류들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망 판정을 받는 순간까지 내 옆에 앉아 숨죽여 울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두면 깨끗하게 화장한 뒤 그때서야 비로소 차가운 소주를 한 잔 마실 것이다. 아내가 에이즈에 걸리면 나도 이렇게 하면 된다.
바보 같은 꿈 이야기를 하다가 큰 통찰을 얻은 날이었다. 그렇다. 서로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좀 바보 같이 살아도 된다. 큰일 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