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없으니 책 읽기는 좋은데

공처가의 캘리

by 편성준


아내가 없으니
읽기는 좋은데
아내가 없는 밤에
책이나 읽고 있다니

아내가 지리산 고은정 선생의 제철요리학교에 일박이일 수업을 하러 갔다. 이번엔 나도 따라가서 스튜디오 옆 실상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며 놀까도 생각했었는데 고양이 순자를 돌보는 문제 때문에 그냥 남기로 했다. 어제저녁엔 피지 섬으로 다시 나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친구 한상이도 만나고 또 자살한 동네 형의 장례식장에도 다녀오고 하느라 술을 좀 마셨다.

새벽에 아내가 버스터미널로 떠난 후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 중 <겨울의 왕>이라는 단편을 주의 깊게 읽었다. 카르히데라는 왕국의 젊은 왕 아르가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르 귄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되었다가 나타나 퇴위를 하려는 중성의(남성도 여성도 아닌) 왕이라는 파격적인 설정에서 시작해 80광년이나 떨어진 에큐멘이라는 곳을 왔다 갔다 하느라 왕국의 과거와 미래 시제가 뒤바뀌기도 한다. 이런 시퀀스들을 마치 '스냅사진' 섞듯이 자유롭게 던지는 이야기라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작품이었다.

아침을 먹으러 성신여대 쪽 콩나물국밥집에 갔다가 오면서 서점에 들렀다. 원래는 이번 '독하다토요일'에서 첫 번째로 읽을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을 살 생각이었으나 마침 재고가 떨어졌다고 해서 필립 로스의 소설 중 안 읽은 걸 하나 사려고 했더니 한 권도 없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서점 직원이 필립 로스가 책 제목인 줄 알았던 것이었다. 필립 로스는 책이 아니라 작가의 이름이라고 설명을 해줬더니 저희 서점은 작가 이름으로는 검색이 안 돼서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할 수 없어 책꽂이 앞에 주저앉아서 책 구경을 좀 하다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1,2권을 샀다. 현금 결제를 해서 19,800원에 두 권을 샀다. 이런 어마어마한 소설이 이만 원도 안 되다니 정말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 스타인벡은 고등학교 때 [에덴의 동쪽]을 읽고 그 호방함과 파격성에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분노의 포도]는 존 포드 감독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기회가 있어서 영화 먼저 본 케이스였다. 헨리 폰다가 주연인 흑백영화였다. 집으로 돌아와 <겨울의 왕>을 마저 읽고 [분노의 포도]를 좀 읽다가 일요일 저녁이 마감인 짧은 글쓰기 칼럼 '글은 짧게, 여운은 길게' 원고를 좀 썼다. 저녁에 아내에게 전화를 해보니 안 받는다. 수업 중인 모양이다. 아내가 없으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는 좋은데, 아내가 없는 휴일 저녁에 혼자 책이나 읽고 있으려니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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