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Jan 15. 2020

독하다 토요일 시즌4 첫 번째 모임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장난처럼 '독하다 토요일'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사람들과 책 읽는 모임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인데 어느덧 '시즌 4'를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6개월이 한 시즌이니 벌써 2년이 후다닥 지나간 것이죠. 그동안 한국 소설을 읽는다는 대전제와 7~8명 정도의 주변 친구들이라는 멤버 구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책 선정의 주제는 '최근 화제가 되었던 소설 읽기'에서 '그들의 리즈 시절' 등으로 약간씩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전 작가들의 작품을 따라 수십 년 전 소설들을 읽다 보니 아무래도 긴장감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도서 선정도 회원 투표로 해봤더니 취향이 다 달라서 그런지 오히려 들쑥날쑥한 느낌이 들었구요. 그래서 이번엔 처음 모임을 시작할 때처럼 제가 그냥 독단적으로 선정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정한 주제는 '다시 당대로!'입니다. 지금 현재 가장 핫한 소설을 읽자는 취지에서였고, 그래서 1월에 우리가 모여 읽을 책은 황정은의 연작소설집 [디디의 우산]이었습니다. 2020년 1월 11일 토요일 오후 2시, 서대문 청춘여가연구소에서 독하다 토요일 시즌 4의 첫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시즌엔 새로운 멤버들이 몇 명 있는데 그중 서울문화재단의 오진이 본부장님은 스케줄이 꼬여 첫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고 여행작가 박재희 선생도 외국 여행과 겹쳐 첫 모임에 빠지게 되어 미안하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김은주 씨도 참석을 못하게 되었구요. 다행히 판소리 창작도 하면서 '당산동커피'라는 가게도 운영하고 있는 최용석 선생이 새로운 멤버로 참석을 했습니다. 최용석 선생은 일어나서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중학교 때 무작정 좋아서 판소리 북을 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시작했으며 이야기가 너무 좋고 노래가 너무 좋은데 판소리엔 그 두 가지가 다 섞여 있어서 결국 창작 판소리를 하며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윤혜자 씨가 최 선생은 지금 소설가 김탁환 선생과 '한없이 좋은 사람, 달문'이라는 창작 판소리를 만들고 있고 그가 몇 년 전 만든 [방탄 철가방]이라는 창작 판소리극은 광주항쟁 40주년을 맞아 올해 5월 광주에서 또다시 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보충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디디의 우산]이라는 책은 교보문고 낭만서점 특별기획 '소설가 50인이 뽑은 2019년 올해의 소설'로 뽑혔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입니다. 저는 이 책을 종이책으로 구입하려고 대학로 동양서림에 갔다가 한 번은 문을 닫아서 그냥 오고 또 한 번은 '방금 누가 사가는 바람에 재고가 없다' 하여 그냥 돌아오는 등 나름 우여곡절을 겪다가 세 번째 방문만에 겨우 손에 넣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전의 그의 소설 [백의 그림자]처럼 이 소설도 세운상가가 중요한 장소로 등장합니다. 저는 건축의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서동현 씨에게 세운상가에 대해 좀 얘기를 해달라는 말로 모임의 문을 열었습니다.

서동현 씨의 말에 의하면 세운상가는 굉장히 특이한 건물이었습니다. 역사적 배경만 해도 '진주만 기습'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됨으로써 당시 항공모함에서 비행기를 띄우는 기술을 최초로 개발해 그 첫 번째로 일본을 폭격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총독부로부터 우리나라에 내려진 '소개공지' 등이 복잡하게 얽혀 세운상가 자리가 형성되었다는 이야기가 세계사를 다룬 기록영화처럼 촤르르 흘러나왔습니다. 종묘 앞에서 대한극장까지의 일직선 토지가 길이 되지 못하고 공터로 남아 있어야 했던 사연도 들려주었습니다. 6.25 이후 피난민들이 그곳에 천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1966년 '불도우저 시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김현옥 시장이 등장해 사창가로 발전했던 '종삼(종로3가)'을 섬멸시켰던 '나비 작전'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김수근이라는 당시 최고의 건축가와 대림건설, 진양건설, 현대건설 등 국내 건설사들의 반강제적 협력으로 인해 지금의 골격을 갖추게 된 것이었고 그런 우여곡절을 이겨낸 뒤 수십 년 만에 '다시 세운'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재개발이 진행되던 차에 2019년 황정은의 소설 속에 세운상가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윤혜자 씨는 이 소설에서 세운상가가 왜 이토록 중심에 등장하는지 궁금했는데 서동현 씨의 설명을 듣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와 다르게 저는 예전에 MBC에서 제작했던 다큐멘터리에서 '허름한 잠바 입고 자가용 끌고 출근하는 돈 많은 세운상가 사장님들'이라는 내용이 생각난다고 하면서 예전 중고등학교 때 일명 백판과 포르노 테이프를 구하러 오던 추억까지 얘기했더니 서동현 씨가 '알고 보면 이 건물은 아직도 토지법 위반에 건축법 위반까지 겸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려줬습니다. 한 마디로 참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근대의 유산인 거죠.

김하늬 씨는 너무 현실적이고 일상적이라 좋았다는 말로 소설에서 받은 인상을 표현했습니다. 작가가 일부러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는데도 이야기 구성이 훌륭했고 중편 <d>에서 주인공 d가 모든 사물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바람에 힘들어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세운상가에서 짐 나르는 일을 하다가 오디오를 고치는 중년 남성 여소녀를 만나 턴테이블을 사고 결국 그 턴테이블 덕분에 죽은 연인 dd의 음반들을 가져와서 여소녀의 가게에서 다시 듣는 장면들이 너무 좋아았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윤혜자 씨는 소설 주인공의 나이가 작가와 같은 1976년 생이라 시대 묘사들이 더 사실적으로 와 닿는다고 했습니다.

정아름 씨는 연작소설의 2부에 해당하는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앞부분에 나오는 정원사 울라브 하우게의 '새 식탁보, 노란색!'으로 시작하는 시가 너무 좋고 사랑스러워서 "나에게도 이런 감성이 남아 있다니! 이런 게 바로 책의 역할이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해 모인 사람 모두를 웃겼습니다. 2부의 주인공인 김소영과 서수경이 마주치게 되는 여러 가지 사건들 중 세월호에 대한 부분들을 읽을 때는 당시 일반 국민들이 느꼈던 도저한 상실감과 무력감을 작가가 치우침이나 감정의 과장 없이 참 잘 표현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당시 나는 어땠었나, 하고 돌아보게 되더라는 것이죠.

정아름 씨의 소감을 계기로 세월호 참사 당일 각자의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김성희 씨는 그때 경기도교육청에 있을 때 어딘가 파견 근무를 나갔었는데 낮에 탑승객들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했다가 저녁 뉴스에서 엉뚱하게 보상금 얘기를 다루는 기사를 접하고는 분노했던 기억을 얘기했고, 윤혜자 씨는 점심때 생선구이 백반집에서 전원 구조되었다는 오보를 접하고 안심했다가 귀가 후 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목격하면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무력감과 절망감을 되짚었습니다. 저도 그날 무엇을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 지 딱 3일째 되는 날이었던 저는 마침 코앞으로 닥친 보험사 경쟁PT를 준비하느라 하루 종일 팀원들과 회의실에 앉아 아이디어를 내고 회의를 하며 TV뉴스 화면으로 아이들이 가라앉는 것은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야근을 끝내고 늦은 밤에 겨우 귀가해 보니 아내가 혼자 소주를 한 병 가까이 비우고 자리에 누워 있더군요. 세월호에 갇혀 있는 아이들 때문에 괴로워서 술을 마셨다는 아내의 말을 들은 뒤 저도 심란해져서 아내가 남긴 술을 혼자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참 답답하고 어이없고 슬픈 밤이었죠. 그날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기억이라도 죄스럽고 개탄스럽기는 모두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정아름 씨는 이 소설 속엔 참 많은 통찰들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하며 자신은 김소영·김소리 자매가 상견례에 다녀오던 아버지의 말(아들 가진 거 유세하냐)에서 느낀 점들이 너무 섬뜩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소설엔 그것 말고도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사건과 현상의 이면에 대한 신선한 해석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제가 그 충격적이었던 '초선 추미애가 국감장서 쌍욕을 읊은 이유(XX는 어떻게 씻었냐 드러운 년들)' 부분을 이야기하자 모두들 작가의 거침없고 서늘한 문장 구사와 정확한 현실인식에 감탄했다는 소감을 털어놨습니다.

김성희 씨는 예전에 세운상가 앞에 있는 '종묘투어'와 '남산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읽었는데 평소 좋아했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처럼 이 소설도 읽을수록 맛이 나서 참 좋았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던한 성격의 d가 인상적이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d가 dd의 형 곽정은을 만나러 갔을 때 들은 '오백 원어치 튀김을 사 먹는' 장면 묘사가 너무나 쏙쏙 눈에 들어와 '아, 이 작가는 정말 글을 잘 쓰는구나'라고 감탄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최용석 씨는 창비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을 즐겨 듣는 편이라 황정은 작가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d>만 읽었다고 밝힌 최용석 씨는 자신은 책을 매우 집중해서 읽어야 겨우 이해가 되는 편이라 평소 소설 읽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 편인데 이 소설은 평이하게 진행되다가도 갑자기 충격적인 대목들이 턱턱 튀어나오는 바람에 매우 흥미로웠다고 했습니다. 읽을 때는 그냥 막 쓰는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대단히 뛰어난 소설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는 것이죠. 그는 특히 1부 마지막에 d가 진공관을 만지고 그 뜨거움에 놀랐을 때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하라고." 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이 작가가 사람의 삶을 무척 존중한다는 걸 느꼈다고 했습니다. 진공관에 대한 여소녀의 경고가 자신에게는 '사람 개개인의 능력을 절대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경고로 읽혔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동현 씨 역시 작가가 주인공과 같은 나이라서 그런지 실제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디테일들 묘사에 혀를 내둘렀다고 말했습니다. 학생운동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96년 연세대학교의 상황은 물론 고시원의 방, 세운상가의 동선 등 시공간에 대한 묘사와 해석이 너무나 명료하고 사실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독하다 토요일 멤버들 중에서도 왕년에 고시원에서 지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어려운 시기가 있는 법이라지만 저로서는 약간 놀라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정아름 씨는 작가가 조근조근 얘기하면서도 담백하고 날카로운 글쓰기라 문득 작가와 개인적으로도 친해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했고 윤혜자 씨는 '아니, 왜 이렇게 소설을 잘 써?'라고 생각하면서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개인의 삶을 통해서 시대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과 비교되는 부분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이 모든 일을 혼자 겪는 설정에 좀 무리가 있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d와 김소영, 서수경, 김소리 등 여러 인간 군상들이 나누어 겪는다는 점에서 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고 그 전쟁터의 원형으로 세운상가라는 장소가 매우 효과적으로 쓰였다고 했습니다. 영화 <벌새>가 떠오르기도 했구요. 둘 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과거의 모습을 잘 형상화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레즈비언 커플을 비롯해서 소수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매우 '무심하게' 등장하는 것도 무척 새로운 접근이었습니다. 윤혜자 씨는 그래서 우리가 소수자의 삶에 대해 너무 호들갑을 떨었던 건 아니었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각각 맹인과 정상인이 쓰는 활자의 뜻을 지닌 점자와 묵자라는 단어를 통해서도 기존의 인식을 뒤집어볼 수 있었고 특히 '서수경이 갑자기 죽어도 김소영에게는 연락이 가지 않는다(법적으로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는 대목에서는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폭력과 배제, 차별 등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소수자, 도시 빈민, 학생운동, 알바생 등 참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저는 윤혜자 씨의 이야기를 받아 서수경과 김소영을 규정하는 문장 중에 '저녁이면 서로의 귀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이'라는 말이 너무 애절하고 슬펐다고 말했고 윤혜자 씨는 자신이 그동안 무심코 했던 '몇 학번이세요?'라는 질문을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결심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자기 또래의 여성들 중 당시 대학교를 다닌 여성은 20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늘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해서 다른 이들이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반성 때문이었습니다. 잘 쓴 소설이 주는 큰 울림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하늬 씨는 <모자>라는 단편을 통해 황정은이라는 작가를 만났는데 이전 소설들이 약간 올드한 느낌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너무 현대적이라 좀 더 읽기가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킬링 타임용'으로는 읽을 수 없는, 문장 하나하나를 모두 곱씹어야만 몸으로 들어오는 소설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대단히 안쓰럽고 따뜻하면서도 좋았다, 까지 말했을 때 오진이 씨가 카톡으로 독후감을 보내왔습니다. 내용 중에 주인공 d가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는 말이 있었는데 들고 보니 정말 그런것도 같아서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최용석 씨는 이 소설이야말로 판소리와 비슷하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에 집중하다가도 갑자기 목소리를 바꿔 종횡무진 뜬금포 같은 이야기를 흩뿌리는데 결국 작가는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적어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황정은 작가의 그런 따뜻한 마음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듯한 '디디의 우산'이라는 제목에서도 잘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130페이지의 '이 상황을 봐라. 얼만 투명하고...얼마나 좆같냐.'라는 대목에서는 세계 대전 직전의 작가들이 가졌던 어떤 조짐을 읽어내는 선지자의 기운까지 느껴지면서 작가의 성별이 필요없어지는(그래서 더 좋은) 글쓰기를 느꼈다고도 했습니다.

제가 'd와 dd는 아무래도 동성 커플인 것 같은데 작품 안에서는 그게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것 같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더니 정아름 씨는 자신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작가가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더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는 깨달음이 오더라는 것이죠. 그게 왜 궁금하지? 자신의 무의식 속에는 어느새 '남자라면 이래야 해' 라든가 '커플이라면 당연히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져야지' 같은 무의식이 깔려 있었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었죠. 사랑하는 사람이면 되지 동성이든 이성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고 작가는 말하고 있었는데 읽는 자신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소리의 아들 정진원이 유치원에서 남녀의 성별에 대해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였죠.


정아름 씨는 이 작가가 너무 글을 잘 쓸뿐 아니라 '기분나쁘지 않게 깨닫게 해주는 힘이 있는 작가'라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적절하고 뛰어난 평가였습니다.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 2부 첫머리에는 말썽쟁이 딸 메리 때문에 장갑 공장을 찾아온 비키라는 여자에게 주인공 스위드가 장갑 생산 공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무두질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가죽 무역 이야기, 그리고 장갑 사업의 역사를 거쳐 재단·재봉 작업에 대한 아주 세세한 공정과 일화까지 설명하는 장면들입니다. 장장 18페이지에 걸쳐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 스펙터클한 묘사는 소설가가 소재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표본이나 다름없습니다. 도대체 필립 로스는 그 한 장면을 쓰기 위해 가죽과 장갑 생산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섭렵했을까요? 저는 [디디의 우산]에서 묘사되는 세운상가의 모습과 여소녀가 스피커와 램프에 대해 말할 때도 똑같은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건 정말 수십 년 경력의 오디오 전문가가 쓰는 단어와 어투로구나. 이건 진짜 세운상가에서 짐을 내리고 올리는 짐꾼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겠구나. 제 얘기를 들은 최용석 씨가 황정은의 아버지가 세운상가에서 일을 하셨다고 어디선가 들었다고 전해줬습니다. 아, 그래서 그랬군요, 하고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세운상가에서 일했던 아버지를 가졌다고 해서 다 황정은 같은 작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2부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독서일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등장합니다. 책을 다 읽은 후에 제가 일 삼아서 한 번 세어 보았는데 하우제, 니체를 비롯해서 안데르센에 대한 새로운 해석, 쌩떽쥐베리의 아름다운 문장, 롤랑 바르뜨의 글들이 쉴 새 없이 인용되면서도 전혀 어색하거나 잘난체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쌔라 워터스,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이 언급되는가 하면 자끄 로제, 카를 야스퍼스, 고병권, 존 윌리엄스, 한나 아렌트, 전진성, 스티븐 핑커, 슈타판 츠바이크 등의 작가가 곳곳에 언급됩니다. 특히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스카이 크롤러]의 비행기 전투 부분이 묘사되는 장면은 가히 문화 덕후가 다른 텍스트를 작품에 어떻게 녹이는지 보여주는 눈부신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기홍 씨는 자신은 사실 김언수의 [뜨거운 피] 같은 작품이 좋다는 얘기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스토리의 선이 뚜렷하고 사건 전개도 기승전결이 명확한 이야기들은 읽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편해서 '어디에든 다 맞는 블록' 같은 느낌인데 비해 [디디의 우산] 같은 소설은 '어디에도 맞지 않는 열쇄'를 받아 든 느낌이랄까, 문장들이 의미하는 게 극명하지 않아서 읽기 어려운 소설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나가다 보니 점점 공감이 가면서 마침내는 '내가 알고 있는 아무개도 이런 삶을 살았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dd는 당연히 여성일 것이라는 생각을 비롯해서 책에 나오는 구절처럼 '상식적으로다가' 생각했던 모든 것들에 기어이 균열을 내는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에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신선하면서도 이렇게 역설적으로 '교훈적인' 소설이 다 있다니. 임기홍 씨는 이 소설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타인에 대한 무한한 공감이 숨어 있는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려고 하는 얘기를 장면 장면마다 다 보여주니 '납득한 줄 모르는 사이에 납득하게 해주는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정아름 씨가 얘기했던 '기분나쁘지 않게 깨닫게 해주는 힘이 있는 작가'와 쌍벽을 이루는 멋진 평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쉽게 해석하기 힘듭니다. 최근 몇 년만 해도 세월호와 탄핵 정국, 검찰개혁 등이 나선형으로 펼쳐지면서 어느 것 하나 사회적 합의를 쉽게 이루지 못합니다. 그럴 때 황정은 같은 소설가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황정은은 어찌 보면 참 무서운 사람이라고, 임기홍 씨는 다시 말했습니다. 그리고 [82년생 김지영]도 이런 식으로 접근했으면 텍스트의 질감이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얘기도 조심스럽게 내놓았습니다.

김소영이 학습지 회사에서 PPT 발표를 할 때 손으로 욕을 하던 남자를 문제 삼자 욕을 한 그 남자보다 '보빨'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 김소영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공적으로 할 수 있느냐고 되려 비난하는 전도본말적인 상황에 대해 제가 열변을 토하려고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카메라를 든 TBS 방송국 PD가 저를 불렀습니다. 이날은 청춘여가연구소의 정은빈 대표가 TBS와 무슨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모임을 갖게 된 저희 '독하다 토요일'도 잠깐 촬영에 임하기로 했고, 또 제가 미니 인터뷰까지 하기로 약속해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원들과 책 얘기를 하다가 졸지에 불려 나간 저는 사람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을 뒤로 하고 카메라 앞에 서서 인터뷰를 해야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는 '독하다 토요일'에 대헤 설명을 하고, 우리는 책을 다 읽지 않아도 그냥 옵니다, 와서 읽으면 되니까...뭐든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얼른 끝내고 술 마시러 갈 겁니다...같은 흰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편성준 씨는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까 그냥 놔두고, 우리는 빨리 나가서 먼저 술을 마시고 있자구요..."라고 말하며 회원들을 채근하는 윤혜자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방송국 사람들이 들어와 분위기가 깨지는 바람에 모임은 자연스럽게 끝이 났고 그 시간에 다시 회사로 가서 일을 해야 하는 김하늬 씨와 다른 약속이 있다던 임기홍 씨를 제외한 나머지는 광화문에 예약해 놓은 음식점으로 가서 삼겹살 6인분, 낙지볶음 2인분, 계란탕 2개, 삼치구이 1개, 맥주 소주 여러 병 등 총 189,000원어치를 나눠먹고 헤어졌습니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저는 모임이 끝나고 홍대앞으로 가서 뚜라미의 졸업생 모임인 오무래미회에 참석해 또 놀다가 막차를 타고 귀가했습니다. 끝으로 회원들의 세줄 평을 소개합니다. 다음 달엔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기로 했습니다.

오진이 :
단편, 중편까지만 읽고 창비까진 못 읽었지만 그 선에서의 느낌을 남깁니다. 결과·성과중심 사회에서 단편.중편,장편으로의 연작을 보는 과정이 새롭다. 말뿐인 과정 중심 속에서 물성이 살아있는 레퍼런스를 보는듯. 잃어버리기 쉽고 잃어버려도 무심한 우산을 챙겨주고 기억하는 기본을 회복한다. d와dd 등장 인물은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 같고 반지하의 공간은 영화 <기생충>도 떠올리게 한다.

김하늬 :
숨 쉬는 방법을 잊은 사람이 숨 쉬는 방법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보인다. 온기와 음악이 소통의 매개체라면, d는 그를 외면하다가 곁에 머물고 결국 손을 뻗어 붙잡았다. 안쓰럽고 따스하다.

정아름 :
소설을 읽다가 작가가 너무 좋아져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어봐야겠다ㅡ 라고 생각한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남남, 여여, 남녀를 떠나 한 사람이 가진 존재의 가치와 그 존재가 주는 위안을 따뜻하고 차분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그 존재가 만들어낸 상실감까지도 그 존재(의 사물)를 통해 회복하는 과정이 참 현실적이어서 더 좋았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푹 퍼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게 담뿍 안겨준 것 같은 느낌(덕분에 나 자신에게도 많이 위안이 된...).

최용석 :
스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들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끄잡아내는 작가의 따뜻한 손길이 좋았습니다. 진공관의 빛이 소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빛나기보다는 비루한 일상들이 만들어내는 진실된 삶의 소리를 만나게 돼 뜻깊은 독서가 됐습니다.

편성준 :
실제로 세운상가에서 일하는 택배원 d와 실제로 오디오를 수리하는 여소녀가 나와서 얘기하는 듯한 황정은의 이 생생하고 단단한 문장들을 보라. [디디의 우산]은 6.25부터 이웅평, 1996년의 대학가, 명박산성, 세월호, 박근혜 국정농단 등을 통과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대한민국의 단면들을 들여다 보고 마침내 어떤 보편적 진실에까지 가닿는 소설이다. 세밀한 취재와 대담한 기획이 돋보이는, 황정은이라는 작가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약간 헐렁해서 더 기분 좋은 추리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