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덕 [애쓰다 지친 나를 위해]
보통 카피라이터가 쓴 책이라고 하면 문체부터 내용까지 감각적이고 날렵할 것이라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그러나 서덕의 글은 그런 예상을 가볍게 배신한다. 이 책은 광고나 카피라이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광고회사를 다니다가 너무나 열심히 일한 나머지 '번아웃' 상태가 되었던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인생에서 '쉼표'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찬찬히 자신을 돌아보며 쓴 글들이기에 진중하고 논리적이다. 그래서 이 책은 카피라이터가 쓴 글이라기보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이 마침 카피라이터였다고 말하는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서덕 씨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만난 카피라이터 후배다. 내가 전에 브런치에 '반말의 어려움 - 말을 잘 놓지 못하는 편입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런 사연으로 지금까지 서로 존댓말을 주고받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서덕 씨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제주도 출신이라는 것, 일찍 보모님을 여의고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는 것, 시인을 꿈꾸던 문학청년이었다는 것, 그리고 굉장히 진지하고 고독하게 열심히 일하는 카피라이터라는 것 정도다. 그러나 그가 그때까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무슨 결정을 하고 사는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거니까. 서덕 씨는 나와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 광고회사를 다녔고 일만 죽어라 하다가 어느 날 '정말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회사를 때려치웠던 모양이다. 쉼이 절실했던 그는 회사를 그만둔 후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하면 쉬는 것도 잘할 수 있는지'와 '쉰다는 것이 다음 스텝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글로 썼고 책으로 묶었다.
지난 11월 한 달간 내가 혼자 제주도의 한 별장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때 서덕 씨에게서 카카오톡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책을 냈다고 하면서 보내주겠다고 주소를 물어온 것이었다. 반가웠다. 제주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의 책이 도착해 있었다. 사실 나는 카피라이터로서의 그 말고 는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낸 책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좋다. 카피를 통해 만나는 것과 글을 통해서 만나는 것은 얼나마 다른 일인가. 이 책에서 그는 어떻게 한 사람이 자신의 생애를 파악하고 치유하고 그를 통해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찬찬히 잘 표현했다.
특히 '주변 사람들이 조금 많이 죽었다. 어머니, 아버지, 누나, 길러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등 나의 탄생과 성장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람들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라고 과거를 담담하게 털어놓은 뒤 과거를 부정할 순 없으므로 과거를 품고 가되,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하는 부분을 읽으며 소년에 어느새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또한 '힘내'라는 상투적인 말에 상처 받다가도 '힘내'라는 말을 하는 그 사람의 진심을 읽고 비로소 힘을 얻는다는 대목에서는 황현산 선생의 [사소한 부탁] 중 <날카로운 근하신년>이라는 글이 생각나서 고개를 끄떡이기도 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려고 애쓰다가 지쳤던 젊은이가 쓴 이 에세이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읽혔으면 좋겠다. 이 책에서는 '쉼표'가 많은 역할을 한다. 책의 부제도 '오늘의 쉼표 에세이'이고 본문에도 쉼이나 쉼표에 대한 단상들이 많이 등장한다. 심지어 제목인 '애쓰다 지친 나를 위해'에도 중간에 쉼표를 하나 넣으면 '지친 나를 위해 애쓰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카피라이터의 재치가 들어 있는 좋은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