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형 한옥 수리 51일째
나는 툭하면 집문서를 잃어버린다. 요즘이야 서류들이 다 전산화되어 있어서 종이로 된 집문서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부동산 사장님의 말에 의하면 계약할 때 등기권리증이라는 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집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은행에 가져다주었거니 생각하고 대출을 받은 은행에 전화를 해 물어보니 거기서는 보관하고 있는 등기권리증이 없다고 한다. 내가 아무리 찾아도 집문서를 찾을 수 없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부동산 사장님이 집에 있는 서류 파일을 있는 대로 다 가져오라고 했다. 등기권리증이 없으면 5만 원인가 비용을 내고 뭔가 증명서를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생각해 보니 내가 평생 처음 구입했던 정릉대우아파트를 팔 때도 집문서가 없어서 신문공고를 내야 할 위기까지 갔었는데(그땐 집문서를 다시 만들면 신문 지면에 조그맣게 공고를 내야 하는 법이 있었다) 다행히 조합에서 일괄적으로 보관하고 있다는 게 밝혀져 한시름 놓았던 기억이 났다 - 옆에서 듣던 아내는 "내가 전부터 집문서 어디 있냐고 그렇게 물었는데 당신이 계속 흘려듣더니 결국 헛돈을 쓰게 됐지 뭐."라고 비난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부동산 중개사무소에 찾아갔더니 사장님이 내 서류 파일들을 들춰보다가 "여기 있네."라고 등기권리증을 간단히 찾아낸 것이었다. 표지에 등기권리증이라고 분명히 쓰여 있는데 왜 내 눈엔 보이지 않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짜 웃기는 건 잔금을 받으러 왔던 한옥 전 주인도 집문서를 잃어버려 5만 원인가 벌금을 물었다는 것이다. 나보다 훨씬 똑똑해 보이는 사람도 그런 실수를 하다니, 하며 약간 위로가 되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돈이 바닥이 났다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하면서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내가 송금을 하고 도장을 찍고 하며 계약서를 꾸미고 있을 때 아내는 마침 부동산 중개사무실로 내려온 세입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무실 안엔 나와 이전 한옥집주인, 우리가 살던 언덕 위의 집을 구입한 부부와 그 자녀(나무라는 태명을 지금도 쓰고 있는 귀여운 여자 아이다), 전세를 얻어 살게 된 세입자까지 한꺼번에 모여 저마다 떠드느라 몹시 산만했다. 그 와중에 아내가 이사를 해야 하는 토요일에 하필 비가 온다는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혼자 이사를 오는 마음씨 착한 세입자가 "그럼 일요일에 이사를 하시면 어때요?"라고 물었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스케줄과 이삿짐센터의 컨디션을 확인해 주었다. 일요일 이사는 신의 한 수였다. 비가 오는 날은 이사업체 직원들이 너무 힘들어 짜증을 낸다고 해서 걱정을 했는데 일요일로 연기를 하면 뽕송뽀송한 날에 좋은 컨디션으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게 다 마음씨 착하고 어진 세입자를 만난 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금요일엔 파란대문집 이정옥 대표와 배우 이승연이 와서 청소를 도와주었다. 두 사람 다 이사를 연기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요즘 내가 가서 혼자 공유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 글을 쓰곤 하는 파란대문집의 이정옥 대표와는 임정희 목수님 얘기를 많이 했다. 공간 공유사업 이전부터 건축과 설계 관련 일을 많이 했던 이 대표가 예전에 임 목수님과 작업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임 목수님은 투덜거리기를 좋아하는 목수였다고 한다. 그런데 4년 후 만나 본 임 목수님은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어 놀랐다고 했다. 우선 작업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느긋해졌고 디테일도 강해졌다는 것이다. "말투부터 달라져 있더라고요."라고 이 대표가 말하고 있는데 마침 임 목수님이 나타났다.
둘은 여전히 가시 돋친 멘트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웃겼다. 오랜 친구 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마이너 한 우정의 기운이 느껴져서 좋았다. 배우 이승연 - 스튜어디스 출신의 유명 탤런트 말고 [벌새] [여배우는 오늘도] [똥파리] 같은 인디영화에 나온 연기파 배우다 - 은 깐느영화제에 다녀온 것도 오래되었고 계획하던 영화에도 차질이 생겨 잠깐 쉬고 있다고 말했는데 목소리에서는 코로나 19 때문에 침체된 공연계나 영화계 전반에 대한 피곤함이 진하게 느껴졌다. 자기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그냥 응원 차 왔다고 하며 웃었지만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할 승연이 아니었다. 집안을 돌아다니며 청소 일을 돕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임 목수님과 이 대표 모두 승연과 금방 친해져서 농담을 나누며 청소를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청소를 대충 마무리하자 임 목수님이 그동안 다루었던 공구와 허접쓰레기, 짐들을 차에 싣고 수원으로 떠났고 우리는 '새천년호프'에 가서 치킨에 맥주와 소주를 마셨다. 약속이 생겨 먼저 떠난 승연이 돈을 냈고 더 마시다가 술에 취한 이 대표가 나머지를 냈다. 나는 남은 안주를 포장해 우리 집으로 올라가서 술 취한 이 대표에게 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이사가 연기되어 하루 여유가 생긴 아내와 나는 새벽에 일어나 뜨거운 밥을 해 먹고 현장으로 내려왔다. 지나치게 일찍 아침을 해먹은 나는 화장실 변기 위에서 갑자기 고등학교 동창인 극작기 최우근의 한심한 일화가 생각나서 그걸 SNS에 올리면서 '이사를 앞둔 사내의 고뇌에 대해 올려야 할 타이밍에 왜 하필 우근이 생각이 나는 걸까.'라며 반성을 했다.
아침 일찍 한옥 수리 현장으로 와 청소를 하다가 배가 고파져 편의점 커피에 빵을 먹으며 청소를 하고 있는데 류왕보 대표님이 두루마리 휴지를 잔뜩 사들고 방문하셨다. 생각해 보면 집수리가 끝나고 우리 집에 온 첫 손님이다. 류 대표는 네모나고 반듯한 마당에 일단 감탄을 한 뒤 안으로 들어와 마루와 작업실, 주방의 바닥 에폭시 마감을 보고는 "겉으로는 전형적인 한옥인데 안으로 들어오니 실내는 남미나 스페인 풍의 이국적인 느낌이 나서 좋습니다."라는 고마운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 두 사람의 사진도 여러 장 찍어 카톡으로 전송을 해주셨다.
아내는 주방과 게스트룸 구석구석을 걸레질하고 나는 거실과 작업실의 책꽂이를 깨끗이 닦았는데 먼지는 닦아도 닦아도 끝없이 나왔다. 마당에 수도 파이프를 샘물 파이프처럼 만들어 놓고 걸레를 빠는 나를 보고 아내가 잘했다고 칭찬을 해서 어깨가 약간 으쓱해져 있는데 황선도 박사님 부인인 강순희 선생이 오셨다. 지난번 작업이 한 창 진행될 때도 오셨었는데 오늘은 작업이 끝난 것도 궁금하고 점심도 사주고 싶어서 오신 것이라 했다. 나폴레옹 과자점 맞은편에서 만난 강 선생은 일단 동네에서 잘하는 중국집에 가자고 해서 '송림원'에 가서 탕수육 소짜에 연태고량주 중짜를 마시고 짜장면과 짬뽕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집으로 와 여기저기를 둘러 보며 소감을 얘기한 강 선생은 '비 오는 날 이사를 하면 잘 산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래도 비 오는 날보다는 안 오는 날 이사하는 게 낫다고 하며 웃었다.
어제오늘 이사 얘기를 하면서 하필 비가 오는 날 이사를 하게 되었다고 했더니 많은 분들이 '비 오는 날 이사하면 잘 산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사실 이 이 말이 과학적 증거라고는 전혀 없는, 그저 힘든 일을 당하게 된 사람에게 전하는 위로의 멘트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결 같이 그런 얘기를 해준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그분들이 너무 고맙다. 그리고 실제로 비 오는 날 이사를 피하게 해주려고 자신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애를 써서 이사 날짜를 변경해준 세입자 또한 너무 고맙다. 남들은 이사하면서 친하던 사람들과도 싸운다는데 우리는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고마운 분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예사롭지 않은 행복이다. 이래저래 우리는 잘살야겠다.